김영화론을 위한 메모

김영화론을 위한 메모

김동일 (미술평론가, 문화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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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영화론에 앞선 사전 메모의 형태를 띤다. 이런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그가 앞으로 보여줄 작업에서 민중미술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어떤 중대한 시사점을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그의 작업은 미미한 개인의 이미지 실천이면서 동시에 민중미술이란 표제어 아래 지칭되는 포괄적인 맥락 위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맥락의 새로운 전개에 대해 지금껏 말 되어지지 않았던 어떤 것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영화의 작업을 이 맥락 위에 여하히 위치 지우느냐에 따라 그는 당대 이미지 실천으로서의 유효성을 시사하는 중요한 범례(exemplar)가 될 수도 있겠다. 이어지는 의문은 작가론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우회하는 통로이겠지만, 효과적으로 관통되었을 때는 오히려 그의 작업이 성취해야 할 ‘시대정신’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이제 물어보자. 아직도 대답 되어지지 못한 질문이다. 오늘날 ‘민중미술’은 무엇인가? 그때 그 시절 그 민중미술가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만약 희대의 불가사의가 미술판에도 있다면? 그것도 한국 현대미술사에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민중미술의 몰락이다., 몰락. 그것도 민중미술의 몰락. 그렇다, 이 몰락은 매우 잔인하다. 왜냐하면 다른 몰락들은 그나마 또 다른 변형을 통해 미술사에서 여전히 질긴 목숨을 유지해 오고 있는데, 예컨대 이미 오래전 후위가 된 모더니즘은 여전히 미술시장에서만은 수명을 연장하고 있다. 그것도 블루칩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미술을 대변하는 조직들은 여전히 견고해 보인다. 하지만 추구해야 할 이상보다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보다 더 예민한 이익집단으로 화석화된 것 같은 이 석연찮은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무언지 공허한, 어딘가 헛다리 짚는, 어느 틈엔가 박제가 되어버린, 횃불의 형상을 하고 있으되 전깃불로 구동되는 인공 조명 같은, 한때는 민중미술이었으나 오늘도 민중미술인 척 연기하는. 억지로 연장된 민중미술의 외형. 차라리 격렬하게 죽어버리는 편이 더 나아 보이는 식물 같은 목숨. 오늘의 민중미술이다. 좀 과한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밖에. 얼마든지 다시 커서를 돌려 지울 수도 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까지 하고 싶지 않은 현재의 민중미술. 이건 미스테리다. 미스테리. 설명되지 않는 리얼리티다. 이제, 실마리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민중미술의 미스테리는 그것만이 아니다. 불가사리보다 더 기괴해 보이는 또 하나의 불가사의인 오늘의 민중미술이 품고 있는 모순은 이미 잘나가던 민중미술의 과거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잘나가던 과거의 민중미술이라고? 물론, 이 역시 역설이다. 민중미술은 저항이다. 저항하는 주체로서의 미술이 잘 나갔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만큼 거대한 억압이 존재했다는 것인데, 그렇게 폭정을 꿰뚫고 새로운 삶의 빛을 잉태했던 미술. 그것이 ‘민중미술’이었다. 적어도 80년대 민중미술은 그랬다. 당시 민중미술은 존재 그 자체만로도 누군가에겐 희망이었다. 그것은 사회적 절망의 극점에서 피어난 통절한 꽃이었으므로. 분명 그 꽃은 그렇게 피어올랐다. 그런데 그처럼 영롱하게 피었던 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별 까닭없이.그런데, 그러나, 그 꽃이 정말 피기는 피었던 것일까? 또, 그 꽃은 정말 꽃이기는 꽃이었을까?그러나 다시 이렇게 묻는 것이 더 옳아 보인다. 그 꽃은 가장 활짝 피었던 그 순간에 이미 시들기 시작했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 절정에 이르기도 전에 자신의 흔적마저 삭제해버려야 했을 치명적인 어떤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80년대 민중미술이 잘 나가던 바로 그때 가장 극렬한 모순에 도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민중미술을 애초부터 시들게 했던 그 무엇들이 어디엔가 도사리고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지나치게 과격한 의문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묻지 않고서는 그 찬란했던 찬란함과 이 초라함 사이의 간극을 메울 길이 없다.

내가 가정하는 건 이렇다. 그 불꽃이 그 몰락을 가져온 것이다. 불꽃 자체가 문제였다. 그 불꽃은 너무나 맹렬하게 연소한 나머지 자신을 비추지 못한 것이다. 민중미술은 민중과 미술 그리고 민중미술 자체를 성찰하지 못했다. 이것을 민중미술의 불감증이라 설정할 수 있을까? 불감증? 민중미술은 밖으로는 강렬하게 타올랐지만 정작 그 불꽃을 내부에서 소화시켜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민중미술 주도 집단 내부의 토론과 반성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그 반성은 결국 그들의 무모함과 불감증을 오히려 더 부추기고 강화하라는 요구에 다르지 않았다. 좀더 무모해지고 좀더 불감하라는 강령을 집단 내에서 더욱 강고히 하는 것에 불과했다.권력의 속성은 무모함과 불감이다. 민중미술은 그 불꽃만큼이나 강렬하게 권력을 닮아 갔던 것이다. 억압하는 자와 저항하는 자가 각기 다른 깃발을 들고서 서로 같아져 버렸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저항했던 자는 폭압했던 자를 밀어내고 또 다른 폭압을 이행한다. 그렇게 90년대 민중미술, 소위 문민정부 출범 이후 민중미술은 미술계 내외부에서 권력집단이 되어버렸다.이처럼 민중미술의 권력화는 오히려 자폐적 몰락을 가져오는 무모한 불감이었고 불감한 무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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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의 무모와 불감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권력을 지향하는 공식적인 조직화이다. 민미협은 미협에 버금가는 관료화된 사무적 권위기구가 되었고, 민중미술이 성취한 상징자본을 몇몇 실천자를 중심으로 독점 공급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상징자본이 어쨌다구? 그럼 어떠냐구? 이 과정이 문제인 것은 민중미술의 본질적인 공동체 성격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공동체란, 정서적 유대감에 기초한 일종의 부족(tribe)을 의미한다. 부족을 작동하는 힘은 카리스마적인 어떤 것이다. 이들은 이해관계에 관한 합리적 계산의 분파적 주체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비일상성과 전대미문, 권위에 대한 반항, 혁명을 통해 전통과 권위를 돌파하려는 갈망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부족은 하나가 된 익명 전체를 의미한다. 공동체적 존재로서 민중미술의 불꽃 역시 그러한 부족적인 힘에서 추출된 것이다. 이 힘이 민중미술의 불꽃을 지탱하는 진정한 구동력이었다. 그러나 그 불꽃을 타오르게 했던 공동체의 활력은 끼리끼리 뭉쳐 서로와 스스로에 대한 비난과 자조를 통해 소진된다. 형식적으론 확장하고 강화되었으되 실질적으로는 와해된 공동체.

그렇다면 민중미술의 몰락을 가져온 두 번째 불감증은? 공동체로서 민중미술이 쌓았던 상징자본을 극소수의 정치지향적 선도집단이 독점해 나가는 과정이 그것이다. 실천적 존재조건으로서의 공동체가 파열된 후, 민중미술은 일종의 분류적 의미로서의 카테고리로 남는다. 이 카테고리의 미술사적 정당성과 권위는 상품의 논리로 변환되면서 민중미술의 상품화로 진전된다.중요한 것은 민중미술의 상품가치를 매우 극소수의 실천자들이 독점해 버린 것인데, 그들은 가나, 학고재, 사비나 같은 몇몇 메이저 화랑을 중심으로 미술계의 ‘스타’로 등장한다. 그들은 풍경화 혹은 형상 형식으로 모더니즘과 화해하며 미술시장의 작은 지분을 차지한다. 물론, 이들과 정반대 되는 방식을 취한 이들도 보인다. 비록 소수지만. 어떤 이들은 초야에 묻혀 때 아닌 관념에 경도되고 또 다른 이는 가장 반사회적이고 반 공동체적인 여고생의 육체를 들고 나타난다. 이처럼 메이저 화랑이 만든 스타들과 호명되지 못한 유령들과 관념적 은둔자들과 반민중적 반골들은 90년대 이후 이른바 ‘포스트민중주의자’들이 가벼운 패러디로 덮어씌운 민중미술로 검색되는 이상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 물론! 이 풍경 속에는 이러한 상황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꿈과 현실 사이를 배회하는 자들도 관측된다.

요약하자면, 민중미술의 관료적 조직화는 그것의 공동체적 존재근거를 붕괴시켰고, 또 한편으로는 민중미술의 분류적 카테고리 전체에 돌려져야 할 집단적 인정을 소수에게 독점적으로 부여함으로써 상당한 경제적 전환률을 달성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더 축약해서 민중미술의 개인화 및 시장중심 재편 정도로 기술할 수 있을까? 민중미술가는 미술시장에서 모던한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개인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더 큰 문제는 앞의 두 과정이 그러한 개인화를 좀더 충분히 진전시키지 못했다는 데 있다. 더할 바 없이 민중미술 또한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장의 도도한 패착을 도리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민중미술은 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내부적 조건을 마련할 필요가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러지 못했다. 현재의 몰락을 설명하는 궁극적인 결핍은 민중미술이 개인을 유의미하게 호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잘 나갈 때 드러난 민중미술의 담론은 미처 미술적 실천의 공동체 속에서 전체를 위한 익명으로 복무했던 대다수의 민중미술가들을 변화된 시장환경에서 경쟁력 있는 개별 이미지 상품 생산자로서 변환시켜내지 못했다. 유의미한 개성으로 전환되지 못한 다수의 실천자들은 한때 타오르는 불꽃이었으되 이제는 존재의 흔적조차 거세된 파편들이 된다. 이들은 인사동 골목 선술집에서 과거의 불꽃을 회상하는 유령들로 유랑하는, 미술의 역사를 만들었지만 철저하게 잊혀진 폐기물이 된 것이다. 극소수의 스타들과 무수한 유령들이 함께하는 민중미술. 무너진 민중미술의 참담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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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민중미술의 마력은 바로 그것의 역설에 있다. 그 역설이란 그 찬란함이 독재권력의 폭압과 비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진정한 역설이란, 철저하게 몰락한 현실 속에서 오히려 그것의 또 다른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인데, 과연 또 다른 형식의 민중미술이 가능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철저하게 지나간 찬란함의 모순이 정제된 지금이야말로 최적의 시기는 아닐까? 필자는 몇 년 전 어느 미술 게시판에 이렇게 썼다. “민중미술을 좋아하면서도 싫은 건, 분명해지는 게 없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건,평면이란 정점을 향해 벌어진 치열한 이론적 규명 때문이다. 원래 리얼리즘은 삶의 내용에 관한 것이며, 이 내용은 편리한 몇 개의 원칙으로 환원될 수 있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전제로 삼는다면, 오히려 더욱 정교한 비평적 규명은 필요할 것이다. 원칙적인 것부터 물어보자.예술과 사회에 대한 관계는 어떻게 맺어지는가? 이 관계 속에서 민중미술가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또 민중에 대한 예술가의 입장은 어떠한가? 민중미술식 발언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목적은 사회적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은 미학적으로 타당한가? 어쩌면 민중미술(리얼리즘) 역시 일종의 이데올로기, 허구는 아닐까? 오히려 과거의 현실을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재생하고 있는 건 아닐까? 민중에 대한 미술가의 선지자적 입장은 타당한 것인가? 민중은 민중미술가 혹은 리얼리스트의 잔소리를 잠자코 들어야만 하는가? 리얼리스트는 민중 안에 있는가, 아니면 밖에 있는가?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 실은 밖에 있지는 않은가? 어쨌거나 그러한 객관적 거리두기는 가능한가? 이러한 의문들은 허잡하기만 한 건가? 민중미술, 혹은 리얼리즘은 이러한 의문에 답하지 않고 기양 해버리는 것인가? just do it?” 물론, 이러한 의문들은 민중미술의 불감증에 관한 것들이다. 민중미술은 ‘민중’과 ‘미술’ 그리고 그것의 결속인 ‘민중미술’의 가능성과 유효성에 대해 더욱 더 성찰해야만 했었다.한층 더 내밀하게. 한층 더 치밀하게.

관건은 이것이다. 새로운, 전혀 새로운 민중미술의 도래는 가능할까? 냉동된 민중미술은 굳어버린 관료 조직의 외피를 깨고 진실로 속깊은 개별적 자의식 위에서 생경하게 나타날 수 있을까? 극소수 스타들을 위한 미술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중저가 상품으로 전락한 민중미술은 상품논리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성취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상품이면서 동시에 견고한 상품의 논리에 저항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오직 저항함으로써만 불타오를 수 있었던 민중미술의 현현함을 되살릴 수는 없을까? 멀리서 억세고 거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보다는, 인식과 감각의 도드라진 신경을 탐색하면서, 천천히, 가까이, 부드럽고 섬세하게 다가서면서, 억눌린 자들의 분노를 일깨우면 안될까? 경제학이 경전이 되고 돈이 신이 되며 한계효용이 성령이 된 신자유주의라는 막강한 토대 위에서, 새로운 형식의 폭력이 조밀하게 작동하는 방식을, 좀더 내밀하게, 좀더 정교하게, 속삭이듯 폭로해주면 안될까? 뻣뻣하게 목에 힘 준 선도 집단의 윤리적 우월성을 멀리 내던진 채, 사회적 행위자의 일상에 접속하는 진정한 민중미술로서 기능하면 안될까? 그렇게, 일방적인 구호나 잔소리가 아닌 대화와 치유로서의 민중미술은 어떤 모습으로 가능할 수 있을까? 생산의 효율성, 자산 가치와 구매력의 증가, 향상된 복지의 형식으로 다가오는 사회 변화가, 실상 나와 제 3세계 민중의 무의식과 육체와 삶을 미묘하게 침식하는 권력의 작동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미술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이런 가능성은 그저 불가능한 가능성에 불과해야만 할까? 그러나, 보여줄 수 있다면, 누가, 어디서,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김영화의 작업이 놓여지는 맥락은 온통 이상한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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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에서 김영화의 작업에 눈을 돌려 보자. 그의 작업은 이러한 의문의 맥락 위에서 유효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김영화 자신이 한때 민중미술이 피워올렸던 과거의 불꽃 속에 있었으며 또, 그 소화된 불꽃과 함께 침잠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김영화는 익명으로서의 지난한 세월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 의미를 모색하기 시작한 여느 민중미술가의 초상이다. 그런데 이 초상은 어딘가 특이하다. 화석이 된 조직으로서의 민중미술, 혹은 거만한 모던 스타들의 화잡하나 공허한 그것과는 다른 어떤 시각적 표현의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이런 평가가 가능한 이유는 그가 과거의 민중미술의 그 찬란함 속에서 마냥 그것을 공유했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영화는 그때 이미 그 혁혁함 속에서 억지와 무지를 감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억지와 무지는 공동체의 희열과 공존하는 모순이었다. 김영화는 공동체의 희열과 그것을 항구적으로 누리기 위한 조직화의 압박이라는 상반된 두 힘을 동시에 체험한 것이다. 이 힘들은 적어도 김영화에겐 상극적으로 경험되었음에 틀림없다. 공동체의 희열을 조직화한다는 건 곧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를 말한다. 분명한 건 김영화의 미술적 실천이 그러한 권력에의 의지와 등가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중요한데, 김영화의 작업은 섬세하고 내밀하며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또 다른 주관성은 공동체 내에서 권력지향적 조직화의 압력에 일정한 저항력으로 작용했을 공산이 크다. 그의 주관성은 그를 민중미술의 주변부로 내몰았을 것이다. 물론, 민중미술 전체의 상징권위를 독점한 소수의 스타들 역시 나름 주관성을 확보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관성이란 전체를 개인에 복속하는 모더니즘의 그것에 더 가깝다고 보는 편이 옳겠다. 그러한 개인적 주관성은 공동체의 희열을 조직화하는 과정과 정합적으로 결합하고 강화되면서 권력에의 의지로 나아가는 민중미술이라는 기괴한 변종 괴물을 낳는다. 이 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서술이 가능하겠지만 결국 민중미술은 큰 틀에서 모더니즘의 일부로 복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스타들의 날렵한 개인성이 파괴적이고 권력지향적이고 분파적인 것이라면, 김영화의 주관성은 좀 더 여성적이고 주변적이며 포괄적인 그 어떤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형식의 주관성이 평자가 그의 작업에서 모종의 새로운 가능성을 읽는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민중미술의 찬란함과 함께 했던 동시에 그 빛이 미처 비추지 못한 내부의 어둠을 경험했던, 그 어둠이 초래한 현실의 나락 속에 침잠했던 한 민중미술가가 민중미술의 과거와 현재를 넘어 미래의 가능성을 육화시키고 있는 순간이다. 그 또한 다수의 익명들처럼 십수년간 유의미한 미술실천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공백 속에서 그는 새로운 사회조건과 변화된 미술실천의 방법 앞에서 주저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이 혼란한 현실 속에서 미술을 통한 저항의 전망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오늘의 상황은 이미 푸코의 편재된 권력과 하버마스의 도구적 권력 개념이 지칭한 새로운 정치 공간으로 변해 있다. 이 공간을 지배하는 담론은 억압과 지배, 억압하는 주체와 지배당하는 객체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호명하고 재편한다. 권력의 오명을 혼자 뒤집어 써 줄 순진한 독재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물리적 권력에 살과 피, 그리고 영혼과 노동을 전유당할 민중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는 하버마스의 체계(system)이건, 혹은 푸코의 담화구성체(discourse formation)이건, 전체로서 작동한다. 체계, 혹은 담화의 지배는 물리적 억압이 아니라 훈육과 관리를 통해 생산증가와 복지의 향상,가처분 소득의 증가 및 뽀대나는 삶의 미학화(스타일화)의 외양을 띠기도 한다. 지배가 전체에 대한 전체의 관리의 형식으로 변환된 것이다. 이 순간, 저항은 어떻게 나타나야 할까? 그 저항의 새로운 미술적 형식은 어떠해야 할까? 김영화의 그 주관성은 지배와 억압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된 이 지점에서 저항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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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하나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그의 저항적 감성이 오랜 공백을 거쳐 희미하게나마 구체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중요한 것은 그 구체화된 희미함을 비평적으로 개념화하는 작업인데, 평자는 아직 이 점에 관해 검증된 결과를 내놓을 수 없다. 미학적 개념화의 단계에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김영화의 작업이 아직은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좀더 분명한 의도와 외양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그러한 개념화가 궁극적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김영화들이 집단적인 수준에서 잊었던 저항의 감각과 감수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데 있다. 다수의 익명들이 사회적 감성의 구조 아래 스며든 의미의 물줄기를 밖으로 드러낼 혈을 뚫고 지류를 만들고 다시금 강물로 흘러 나아간 바다를 만들어야 한다. 비평(미학)적 개념화란 적어도 집단적 수준에서 최소한의 유의미한 흐름을 이루었을 때 붙여지는 물줄기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김영화가 그러한 물줄기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 대답을 유보해야 할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물줄기를 통째로 이끌어내기엔 너무나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워 보인다. 하지만 비교적 확실하게 그러한 새로운 가능성이 가능으로 기능한다면, 김영화는 그것의 일부로서 그 전체를 환유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보인다. 비록 그가 그 흐름의 주변에 설지라도. 그렇다면, 김영화에 의해 담보되는 저항의 미학은 무엇일까? 과도기적인 개념임을 전제로 일단 ‘신경미학(神經美學)’이라 불러두자. 신경미학이라. 이 신경의 문제는 민중미술에 참여하던 당시부터 현재까지 그가 몰입해 온 과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신경의 시지각적 현상에 관한 의학적, 혹은 심리학적 담론을 추적하자는 것이 아니라, 신경의 현상학적 경험들이 김영화라는 작가에 의해 주관적으로 인식되고 체험되는 과정을 밝혀보자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신경에 관한 작가의 인식과 체험이 이미지로 객관화되는 과정을 통해 어떠한 형태로 저항과 비판의 새로운 가능성을 담보할 것이냐 하는 의문을 추적해 나가는 지점에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신경의 문제가 김영화의 주관을 관통하여 객관화되는 과정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건 작가 자신의 신경미학이 아직은 모호해 보이는 탓도 있지만 평자에게 그의 신경미학을 비평적으로 개념화할 관심과 언어가 아직은 충분치 못하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확인되는 건,그가 말하는 ‘신경’이 적어도 김영화라는 작가에게는 세계를 바라보는 남다른 관점과 연계된다는 것이다.

신경이 갖는 한자적 의미를 풀어 쓰지 않더라도 그것은 내밀한 의식에 접촉하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육체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의식과 정신, 그리고 살과 피를 내연하는 복잡하고도 정밀한 연결망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지배와 저항의 지평에서 신경의 문제를 해석하는 작업이 가능하기나 할까?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일까? 확실치는 않지만 다음과 같은 가정이 그다지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지배와 저항의 현재적 상황에서 신경은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여기서 푸코가 지적한 권력의 속성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권력은 이미 18세기 국왕 살해범 다미앙을 찢어 죽일 때처럼 그토록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한 권력은 저편에 선 왕의 손에 쥐어진 물리적 폭력의 형식을 취하지만 오늘날 권력의 작동은 밴덤이 고안한 상상적 감시체계인 판옵티콘을 빌어 푸코가 역설했던 바, 모든 곳에 편재하며 철저하게 개인 단위에서 의식과 육체를 관통하는 방편을 취하고 있다. 푸코가 담론의 ‘장치’(apparatus)와 ‘훈육’(disciplinary)을 강조한 것은 그것들이 권력의 효과를 치밀하게 관철시키기 위한 미시적인 메카니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은 김영화의 신경미학 속에서 해석될 여지를 갖는다. 현대의 미시적 권력이란 곧 신경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담화적 장치를 통해 자행되는 훈육이란 단지 육체의 관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의식의 세뇌(洗腦, indoctrination)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훈육이란 결국 육체와 의식의 연결고리, 곧 신경망을 반복적으로 조련하고 관리함으로써 전체를 지배하려는 방법과 절차를 말한다. 이 신경망은 개인의 조밀한 생리학적 체계이면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소위 ‘감성의 구조’(structure of sentiment)라는 형태를 띤다. 판옵티콘의 감시와 훈육체계는 이러한 보편적 신경조직망을 장악함으로써 집단적인 수준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막강한 전략이다. 이처럼 신경의 지배는 드러나지 않으면서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는 거시적인 지배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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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신경의 지배의 역방향을 탐색해 볼 필요가 있다. 김영화의 신경미학이 뒤쳐진 오늘의 민중미술에 내재된 새로운 가능성의 범례가 되려면 관건은 이것이다. 신경을 통해 또 다른 저항의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미 훈육된 신경망을 재조직함으로써 세계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부여를 성취할 수 있어야 한다. 김영화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서 이 가능성을 마땅히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그가 제시하는 신경미학의 저항적 성격이 현실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부르디외의 ‘아비튀스’(habitus)와 ‘일루지오’(illusio) 개념은 중요한 관망을 열어준다. 그 개념은 지배와 저항의 관점에서 신경망의 (재)조직에 관한 투쟁을 함축하고 있다. 아비튀스 개념은 조직화된 사회적 습성으로 구조화된 전체이며 또한 실천을 산출하는 구조를 가리킨다. 실천의 구조적 성향(disposition) 체계인 아비투스는 개인의 은밀한 실천에 일정한 논리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실천의 논리를 집단적 수준에서 조율하는 보편적 성향체계이기도 하다. 김영화의 신경미학의 저항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지점에서 부르디외의 아비튀스 개념을 검토하는 이유는 그것 역시 미시와 거시, 개인과 집단, 그리고 의식과 육체를 연결하는 신경망의 작동을 파헤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건, 이 아비튀스 개념이 결국 장내의 ‘상징자본’을 전유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의 과정이자 결과라는 것이다. 상징적 투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지배와 저항의 실천적 산물로서의 아비튀스는 개인의 신경망을 집단적 수준에서 조직과 재조직을 거침으로써 상징권력을 획득한다. 물론, 신경망의 (재)조직을 통한 정치적 함의는 이미 푸코가 훈육을 통해 감시와 관리의 효과를 확장하려는 담화권력 개념으로 지적한 바 있지만, 부르디외가 돋보이는 이유는 그런 신경망의 조직을 ‘실천’(practice)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아비튀스는 항구적으로 권력의 요구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장내 투쟁자들이 행하는 전략적 실천에 따라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저항적 실천을 통한 신경망의 재조직 가능성을 얼마든지 열어둔다. 이를 김영화가 ‘신경미학’의 저항적 속성과 연결할 때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을 얻게 된다. 김영화의 신경미학이란, 이미지를 통해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육체의 살과 피를 관통하려는 전략이다. 그는 이 전략으로 권력의 작동을 폭로하고 새로운 저항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것이며 이러한 시도는 충분히 비평적 근거를 갖는다. 만약 이러한 잠정적 결론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김영화의 작업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은 극히 중요하다. 김영화가 제시하는 신경미학의 저항적 가능성과 그 위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민중미술이 온전히 김영화의 작업을 통해 증명되어야 하는 이 글이 여전히 ‘준비적 메모’의 단계에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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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적 단계에서 확인된 건, 김영화가 구사하는 미학적 실천 속에서 신경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그의 작업을 꿰는 핵심이었다. 김영화가 신경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무엇보다 자신의 육체에 가해진 ‘고통’을 권력의 지배와 억압으로 개입시킴으로써 성취된다. 이때 이 고통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통은 신경미학적 변환의 요인인 권력의 짓누름인 동시에 극렬한 저항으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계기이기 때문이다. 1987년 2월 25, 바탕골 행위미술제에서 벌인 [죄다죄다]에서 그는 하나의 육체를 밧줄에 매달아 올리면서 이렇게 적는다.




“깡그리 내장 발겨/ 갈갈이 찢긴 닭을/ 천진한 개새끼들/ 이리저리 장난친다/ 생은 돌연 헛무덤/ 빈들에 외침/ 나는 간다 거지발싸개/ 내 다시 태어나 너를 죽이리라/ 가자!” 이에서 김영화가 체현하고 은유하려는 고통은 극한의 것이다. 그것은 ‘깡그리 내장(까지) 발겨’질 때 느껴지는 종류의 것이다. 다시 이 고통은 “내 다시 태어나 너를 죽이리라”라는 그악한 저항으로 이동하고, “가자!”라는 이 한마디 외침으로 전망적 투지를 내지른다. 이 고통은 육체의 영역에서 체감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극밀한 신경망을 통해 의식의 수준에 도달하는 종류의 것이었다.자신의 몸과 의식은 단순히 개인의 것이 아니라 그 몸과 의식이 은유, 혹은 환유하는 민중들의 그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몸과 의식은 그 자체로 집단적 수준에서 설정된 민중 개념과 개별적 미술실천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김영화를 연결하는 신경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때 한 개인인 김영화와 집단으로서의 민중을 하나로 만드는 신경은 시각적 표현을 통한 은유적 연결망이다. 그러한 은유적 속성은 같은 해 대학로에서 행해진 김영화 공연판, [난, 죄 없어!]에서도 보여진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일종의 집단 춤 형식으로 낙태의 문제를 다룬다.“거, 뭔 소리냐? 세상사람들 잡다하디 잡다한 여러 일 중에 낙태라는 일이 있다. 인공유산이라고도 하는데 풀어 말하자면, 사람의 억지힘으로 채 모양도 갖추지 못한 생명을 끝내게 하는 일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낙태시키다라는 말은 있어도 낙태당하다하는 말은 없다. 그런가? 있다. 그들은 이 시대의 희생제물로서 낙태당했고, 그들은 이 시대의 속제양으로서 낙태당했다.그들은 지금도 어디에선가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 낙태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저들은 이 시간에도 곳곳에서 실제로 수없이 많은 생명을 낙태시키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참으로 낙태시켜야만 할 일이 있나? 물론이다. 낙태가 횡행하는 현실이야말로 그렇고. 희망과 좌절감이 뒤숭숭하게 뒤얽힌 이 시대의 모양들이 그렇고. 오늘의 만연된 불신감이 그렇고, 팽배한 폭력이 그렇고, 다양한 고문이 그렇고. 씨는 뿌리고 거두지 못하는 일. 묻겠다. 낙태는 죄인가?, 죄 없어! 이거 뭔 소리여? 그럼, 뉘 죄냐, 도대체? 그것을 밝히고 드러내는 일이 우리 차지일 것이다.




김영화에게 낙태란 정치적 억압의 은유적 변형으로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낙태는 곧 ‘사람의 억지힘으로 채 모양도 갖추지 못한 생명을 끝내게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권력의 정치적 억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김영화는 죽임의 문제를 익명의 ‘그들’로 확장한다.“그들은 이 시대의 희생제물로서 낙태당했고, 그들은 이 시대의 속제양으로서 낙태당했다.” 물론, 낙태는 ‘그들’에겐 억압이지만 동시에 ‘낙태가 횡행하는 현실’과 ‘오늘의 만연된 불신감’, ‘팽배한 폭력’을 ‘낙태시켜야만 할’ 것들로 규정하는 저항의 수단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김영화에게 퍼포먼스란 낙태의 정치적 은유를 시각적 표현으로 변환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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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민중미술 작업에서 나타나는 김영화의 신경미학의 저항적 전략을 도식해보면 다음과 같다.




권력의 억압은 신경을 통해 고통으로 변환된다. 김영화의 신경미학은 이 고통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거기서 저항 에너지로서의 분노를 생산한다. 이 분노는 신경의 논리를 통해 이미지 산출 체계를 거쳐 생산되면서 저항으로서의 미술로 표출된다. 신경미학의 저항적 전략이라고나 할까? 2회 개인전 [너를 그리면 너를 이루는가(이하 ‘너를...’로 줄임)](자하문 미술관, 1992)의 작가 서문에서 김영화는 이 전략을 니이버로부터 이렇게 끌어온다. ““마르크스는 말한다. “무산계급이 현존하는 질서의 붕괴를 선언할 때 그것은 그 자신의 존재의 비밀을 선언한 데 불과하다. 이는 그것 자체가 현질서의 사실상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산계급이 사유재산의 부인을 원한다면, 그것은 그것이 이미 부지불식간에 사회의 부정적 산물로서 자기 안에 구현된 것을 하나의 일반적인 사회의 원칙으로 들어올리는 것뿐이다.” 마르크스의 이 교리에는 감탄할 만한 그 어떤 것이 들어있다. 그것은 하나의 교리 이상의 것이다. (중략) 노동자들의 지위하락을 그의 궁극적인 지위고양의 원인으로 삼은 것, 그의 모든 재산의 상실에서 아무도 소유의 특권을 가지지 않는 문명의 장래를 보는 것, 이것은 위대한 희곡과 고전적 종교의 표현처럼 패배로부터 승리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뒤집힌 꿈으로, 130 x 162 cm, 캔바스에 아크릴릭, 1991


이 시기에 김영화가 마르크시즘에 기대었던 것은 ‘패배로부터 승리를 도출해 내는’ 힘이었다.이 힘의 가시적 형식이 바로 개인 또는 집단의 신경망이 파괴됨으로써 파열하는 고통의 극대화로 나타났던 것이다. [너를...]은 가히 민중미술이 보여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을 의도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도살, 낙태, 죽음의 순간이다.

[너를...]은 신경미학의 저항적 전략에 있어서 김영화의 초기 민중미술기를 종합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전략의 한계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통의 극한을 통과한 그 저항은 과연 의도대로 성취되었을까? 불행히도 그러지 못했다. 그러한 전략적 실패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전시가 열렸던 1992년 무렵, 모든 정치적 저항의 제도적 정당화 기능을 수행했던 소비에트 연방은 허망히 무너졌고 내부적으로 1990년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였던 김영삼은 3당 야합으로 독재정권의 하수인이 된다. 물론, [너를...]이 보여준 이미지들은 여전히 강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초기 신경미학의 저항 전략의 한계는 이미 일정 부분 노정되어 있었다. 김영화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니이버로부터 다시 끌어온다. “문명의 제한에서 오는 고통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 말고 누가 그들보다 한 문명의 참 성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는가?그들 자신의 생활에서 낡은 사회적 실재의 파산을 경험한 사람들 외에 어느 누가 꾸밈없는 말로서 사회이상을 진술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삶에서 굶주림과 복수와 성스러운 꿈이 한데 어울려서 폭풍 같은 열정을 일으키는 그런 사람들 외에 누가 그들보다 더 창조적인 활력을 가지고 낡은 것을 때려 부수고 새 것을 건설할 것인가?” 이러한 확신을 신경미학의 전략적 한계로 읽는 이유는 다소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났던 저간의 문맥적 징후들 때문이다. 93년 사이비 민주정권이 소위 ‘문민정부’란 이름으로 출범하고 이른바 ‘세계화’라는 미명아래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체제를 도입, 확산한다. 민중미술은 투쟁 대상의 소멸을 선언하고 유효한 저항 미술운동으로서의 존재를 포기하며 94년 [민중미술 15년전]을 국립현대미술관에 펼친다. 이제, 저항할 이유도 고통을 분출할 필요도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통을 극점으로 새로운 변화를 추동할 저항의 힘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했었을까?

이를 초기 신경미학의 한계로 읽는 더 직접적인 이유는 6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열린 3회 개인전 [저는 그림자입니다(이하 ‘저는...’)](원서갤러리, 1998)에서 발견되는 변화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기존 신경미학의 정치적 속성들을 완전히 놓아 버린다. [너를...]에서 보여 주었던 그 극렬한 폭력으로 육체와 의식에 체현되었던 고통과 절망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저는...] 역시 좀더 포괄적인 맥락에서 신경미학의 일부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해석의 가능성은 모호하고 간접적이며 우회적이다. 무엇보다 이 전시에서 김영화 자신은 [너를...], 혹은 이전의 [죄다죄다], [난, 죄 없어!]에서 보여주었던 고통을 체감하고 이미지로서 실천했던 확신에 찬 행위자가 아니라, ‘그림자’라는 모호한 정체성으로 나타난다. 김영화는 간명하게 말한다. “모른다. 그래서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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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엇을 모르는 걸까? 모르는데 왜 그리는 걸까? 모르는데 어떻게 그린다는 걸까? [저는...]에서 중요한 건 김영화가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 비로소 그는 회화의 도정에서 ‘실천’으로서의 그림의 0도를 확인했다고나 할까?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모든 합리적 설명이 소진된 기저암(bedrock)에서 오롯이 남은 ‘그냥 하기’(just doing)로서의 그림이다. 물론, 초기 민중미술기의 회화 역시 실천 아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정치적 목적에 복무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실천’ 그 자체에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저는...]에서 김영화는 정치적 지향성을 상실했고 그래서 ‘그림자’가 되었지만, 도리어 가장 귀중한 무엇을 찾은 셈이다. 어떤 목표도 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린다는 것이며 그렇게 ‘그냥’ 그림으로써 또 다른 상황을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저기, 680 x 182 cm, 캔바스에 아크릴릭, 1997


특히 신경미학의 관점에서 [저는...]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신경미학의 정치적 효용에 있어서 김영화 자신의 개성을 반성하고 확인하는 계기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초기 민중미술기에서 내보인 신경미학의 정치성은 효과적인 것임에는 틀림없었지만 민중미술의 일반적 미학 실천의 특성이었을 뿐이었다. 그 일반성 속에서 개별적 저항의 실천자로서 김영화 본연의 ‘개성’은 감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영화는 자신의 실천, 아무것도 모르지만,그래서 그렸지만, 그 행위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억압했던 집단적 일반성에서 벗어날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두 번째 의미는 더 중요한데, 김영화의 신경미학으로 발현되는 개성의 구체적 ‘내용성’ 이다.그는 신경미학을 자기화시키고 있으며 그러한 자기화의 양상은 세계가 이미지와 만나는 접점인 캔바스 표면과 자신의 시신경, 즉 감각의 표면이 서로 일치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신경에 감각되는 그대로의 것을 캔바스 위에 그렸다. 이것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경의 집단적 일반성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만의 감각신경에 몰입할 수 있었다는 말인데, 집중된 감각은 오직 이성에 의해 통제된 영역이 아니었다. 만일 그가 합리적 이성에 지배된 감각신경의 반응 결과만을 그렸더라면 그의 풍경은 신고전주의나 인상파적인 어떤 것을 닮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김영화의 어떤 신경-풍경은 이성적 재현도 아니고 감각적 상상도 아닌 재현이면서 상상인 어떤 세계가 그려지고 있었다.




[ 저는...]에서 그려지는 풍경은 세계와 상상으로 감각과 캔바스의 표면이 일치하는 지점에서 점점 0도를 잡아 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육체와 의식이 교접하는 어느 지점에서 잠든 것도 아닌 깨어있는 것도 아닌 어렴풋한 이성과 감성이 극도로 지쳐버린 채, 아무것도 명료하지 않은 그대로 자리잡은 ‘또 다른 정신공간(精神空間) ’.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어둠은 어둠대로 밝음은 밝음대로 아득한 시간의 그림자여” 확실한 건, 위 도식에서 보이는 모든 극점의 교점을 구하면 김영화 ‘자신(自身)’에게 구현된 구체적이고도 개성적인 신경연결망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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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회 개인전 이후 10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의 신경미학은 어떻게 진척되었을까? 그냥 그린다는 화두로부터 신경미학의 어떤 가능성을 회복한 것일까? 그는 무엇을 사고하고 어떻게 그렸을까? 가장 궁금한 것은 그것의 저항적 가능성이 어떻게 회복되었을까, 그것이다.놀라운 것은 그가 신경미학의 문제를 아예 전시의 표제명으로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간 신경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복해서 들어오긴 했지만 이처럼 전면에 내세우리라고 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올해 준비되고 있는 4회 개인전 제목은 [Gut Sutra], 여기에 ‘영혼의 경전’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멀쩡한 신경(神經, neuron)을 ‘것 수트라’(Gut Sutra)로 격의(格義)하는데, 왜 그런가?” 단어의 조합은 물론 gut + sutra = 神 + 經 의 대응일 것이다. sūtra가 깨달은 자의 가르침을 엮은 책이라는 산스크리트어인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흥미롭게도 gut을 神, 곧 영혼(soul)과 등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gut의 사전적 의미는 ‘창자, 용기와 결단, 내용 혹은 실질’ 등이다. 물론, ‘좁은 길, 명주실’ 등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것을 정신 혹은 영혼의 의미로 탈바꿈한다는 것은 다소 비약적인 발상이 아닐까? 그러나, ‘gut feeling’은 ‘직감’이다. 본능으로 알아차려 온몸으로 직입하는 감(感). 그리하여 이것을 비약으로 읽기 보다는 오히려 신의 문제를 내장의 문제, 육체의 가장 깊숙한 실질에 관련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보는 편이 문맥상 타당해 보인다. 그만큼 신경이란 영혼과 육체를 가장 내밀하고 섬세한 수준에서 관련시키는 연결망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경전이라는 [Gut Sutra]는 정신과 몸을 아우르는 논리이며 그 혼재된 힘에서 솟아나오는 영혼의 발휘인 동시에 무엇보다 육체와 영혼의 관계성의 진리를 은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 창자와 영혼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서 그것들의 작동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어떤 조직원리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일까? 그렇다면 관건은 이것이다. 이 육체와 영혼의 논리에 대한 김영화의 진단이 과연 상실된 신경미학으로 추출되는 저항의 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10년 전 그가 확인하였던 오롯한 실천으로서의 그리기와 그 속에서 감지되었던 김영화 자신의 개성적인 신경미학이 과연 저항의 0도로서 또 다시 작동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내용성에 따라 그는 지난 십수년간의 배회에서 빠져나와 여전히 유효한 민중미술의 실천자로 남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김영화는 이른바 후기 민중미술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유효한 범례일 수도 있다. 물론,이 유효성은 과거 민중미술과의 차별성과 그 차별성을 근거로 한 새로운 정체성을 기준으로만 측정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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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전시가 예의 그 신경미학의 저항적 속성을 어느 정도 차별적인 수준으로 회복하고 있다는 점만은 확실해 보인다. 출품 예정작에서 확인되는 바에 따르면, [저는...]에서 관측되었던 육체와 의식의 교점으로서의 감각과 이미지의 장으로서의 캔바스가 서로 일치시키는 지점이 매우 정교하게 조율되어 있다. 시신경의 반응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 정확하게 캔버스 위의 이미지들과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보이는 대로 그린 것 그 자체가 이미지가 된다는 것으로 캔바스가 시신경에 대응하는 지점을 효과적으로 찾아냄으로써 명확한 대응점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건 마치 사진가의 카메라가 초점을 맞추는 것과 같다. 이 신경과 캔바스의 초점에서 관찰되는 것은 의식과 상상이 결합된 양상으로서 지각은 이미 기억이므로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뇌가 본다는 그것이다. 그렇게 캔바스라는 망막에 비추인 이미지는 단순한 사물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김영화라는 예술가에 의해 시각적인 은유의 형식으로 제시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작가에 의해 제시된 이미지가 평자가 보기에는 매우 직접적으로 이 사회를 작동하는 메카니즘, 즉 자본의 논리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추측컨대 김영화가 말하는 창자의 논리나 영혼의 작동이 창자와 영혼의 관계성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자본이라는 것이다. <12개의 약속>은 망막으로서의 캔바스 표면에서 벗겨진 은빛 도료 저편으로부터 묵묵히 자신을 드러내는 ‘돈’의 형상을 추적한다. 돈은 곧 한계효용을 교리 삼아 가진 자의 이익을 무차별하게 관철시키는 자본주의 체제의 절대신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은 이 절대존재인 화폐를 따라 움직인다.반질대는 은빛 저편에서 인간의 신경세포처럼 몸과 정신을 지배하는 절대존재,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정작 추한 것을 말초적 효용에 호소하는 상품의 논리인 것이다. 이 논리 장막 뒤에서 미소짓는 음험한 돈의 존재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눈뜬 장님’에 불과하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자본주의의 절대신 곧 돈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김영화 자신이다. 여전히 [Gut Sutra]가 제시할지도 모를 후기 민중미술 역시 전기 민중미술이 보여주었던 민중미술가의 윤리적 우월성과 선도성을 반복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김영화 자신만이 현 사회 한국을 지배하는 저편의 보이지 않는 논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인가? 후기 민중미술 또한 그것이 민중미술인 이상 저항의 입장에서 억압의 담론에 대한 역담론을 생산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미술적 표현의 어느 정도 선도성을 보여줄 수밖에 없을 터이지만, 그러한 선도성은 비교적 최소한의 수준에서 제기되어 있다는 점 역시 지적되어야 될 듯하다. 후기 민중미술의 최소한의 선도성이란 억압받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보이지만-드러나지 않는’(seen-but-unnoticed) 속성에 대한 자의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김영화는 결코 오직 자신만이 돈의 논리를 보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모두의 생각 어딘가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후기 민중미술가로서 김영화의 선도성이 전기와 다른 점은 그것을 파괴하고 제거하자고 선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 이제 어쩌지? 이렇게 되묻는 듯하다. 서서히 자본주의의 종말을 향해 곤두박질 치고 있다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가 이 돈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날 수 있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그런데 그것이 진정 가능하기는 할까? 이 상황을 벗어나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한다고 그는 말하지 못한다. 질문을 던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최소한의 선도성을 사회적 진실에 대한 담담한 주장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보잘것들> 역시 시신경의 인지면과 캔바스의 표면이 정교하게 일치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인지 불가능한 속도 또는 음량으로 메시지를 내보내서 행동을 자극한다는 소위 잠재의식광고 효과를 노린다는 작가의 의도를 현재로선 분명히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시신경의 상상적 반응으로 변환되기 이전 저편에서 내 몸을 도륙하는 듯한 저 괴물의 형상은 자본주의의 신, 곧 돈이 아닐까 싶다. 이 괴물의 모습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나도 남도 아닌 모습을 하면서 욕망의 충족을 불허하는 캔바스 앞에 선 작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본의 위력, 화폐의 힘이 그 앞을 오가게 될 관객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켜보는 또 다른 관객들에게 인지시키려는 것일까? 이 괴물 앞에 위치될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돈의 논리에 저항하는 자라면, 그 기본형은 작가 자신일 것이다.

<사육>은 작가 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끝없는 복종을 요구하는 괴물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이 괴물은 번득이는 은빛 저편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는 자본의 내용을 은유적으로 형상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은 불의 형상으로 타오르는 욕망의 형태를 띤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신은 영혼의 본색이며, 그 ‘것’은 짐승이다. 천박하고 더럽고 야비하고 침울한 시궁창일 뿐더러 변덕스러운데다 누런 이빨이며 음울한 곰팡이, 옹그린 등뼈에 득달같이 달라붙는 피곤. 벼랑 끝에 매달린 거무튀튀한 성욕에다 거미줄로 엉겨붙은 증오에다 발칙한 질투에다 엉거주춤 천둥벌거숭이 연애질에다 비릿한 울부짖음. 두런두런 샘솟는 핏물. (중략)” 물론, 이 불길은 돈의 논리 속에서 길들여지면서 타오르는 우리 자신의 숨겨진 욕망일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돈이 신이 되는, 그리하여 결국 돈이 되고자 기꺼이 파멸을 마다하지 않는(<순교하시겠습니까?>), 이 체제에 길들여진 존재로서 우리는 자본에 깊이 사육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증거는 뜨겁게 달구어진 낙인으로 지져진 발정한 숫자와 기호로서 육화된 형상일 수 있다.





12

현재로선 김영화가 보여줄 가능성에 대해 어떤 평가가 가능할지 조심스럽다. 무엇보다 그가 보여줄 미술실천의 공간은 전기 민중미술을 넘어설 후기의 가능성 여부, 그리고 그 가능성이 또 다시 세계와 민중에 말을 거는 방식과 그 효용에 따라 판단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거대한 문맥적 상황 위에서 김영화는 비교적 타당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찬란했던 전기 민중미술과 몰락한 현재 사이에 만들어진 불가사의한 공백을 [Gut Sutra]만으로 채우기를 바라는 건 무리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은 일종의 극복인 동시에 연장이다. 그것은 마치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속을 만나면 친속을 죽여라(逢佛殺佛 逢祖殺祖 逢羅漢殺羅漢 逢父母殺父母 逢親眷殺親眷)”라는 임제선사의 설법을 닮아 있다. 길 없는 길이라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서 전형화된 부처와 조사와 아라한과 부모와 친속을 만나면 서슴없이 죽이라는 것은 해탈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만, 동시에 자신처럼 달을 추구하는 또 다른 손가락에게 자신이 죽인 부처와 조사와 아라한과 부모와 친속이 되는 틀에서는 영원한 뫼비우스띠에 다름 아니다.

이 비유를 민중미술의 상황에 적용해도 될까? 다음과 같은 형식이 될 수 있겠다. 전기 민중미술은 후기 민중미술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만 참다운 민중미술로서의 존재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 극복과 연장에 있어서 가장 정당한 주체는 전기를 겪은 채 후기를 건설해야 하는 실천자들이며, 그 길에 나선 한 사람이 김영화라는 것이다. 그가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철저하고도 가혹하게 민중미술을 죽여야 할 것이며 또 다시 죽어야 할 것이다. 그가 어떻게 ‘죽어’ 깨달음을 얻을지 또 얼마만큼 ‘죽여’ 깨달음을 줄지, [것 수트라]는 그 전망을 가늠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렇게 민중미술의 후기적 가능성은 그러한 죽임과 삶, 다시 죽음이라는 거대한 회귀로서 전체적인 형상을 만들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갖는 방식으로 새가 날개를 갖듯이... 




2008년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