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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집회 걸개

2003 3 22
종묘공원


12 x 3 m
캔바스 천에 아크릴릭
2003






너를 그리면 너를 이루는가







1
너여!


마르크스는 말한다. “무산계급이 현존하는 질서의 붕괴를 선언할 때 그것은 그 자신의 존재의 비밀을 선언한 데 불과하다. 이는 그것 자체가 현질서의 사실상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산계급이 사유재산의 부인을 원한다면, 그것은 그것이 이미 부지불식간에 사회의 부정적 산물로서 자기 안에 구현된 것을 하나의 일반적인 사회의 원칙으로 들어올리는 것뿐이다.” 마르크스의 이 교리에는 감탄할 만한 그 어떤 것이 들어있다. 그것은 하나의 교리 이상의 것이다. 이는 무산계급의 운명에 대한 하나의 극적이고 또 얼마쯤은 종교적인 해석이다. 그의 경제적인 노동가치설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 가치의 가치초월이라는 이 기도는 굉장한 것이다. 노동자들의 지위하락을 그의 궁극적인 지위고양의 원인으로 삼은 것, 그의 모든 재산의 상실에서 아무도 소유의 특권을 가지지 않는 문명의 장래를 보는 것, 이것은 위대한 희곡과 고전적 종교의 표현처럼 패배로부터 승리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본능에 의하여 움직이고 이성과 양심의 규범을 무시하는 산업기구는 그 잔인성 때문에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을 결정론자로 만든다. 사실들을 변경하지 않는 도덕적 허식으로써 잔인성을 숨기려는 문화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을 냉소주의자로 만든다. 그러한 문명의 정신적인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구세주인 무산자가 더욱 희생자가 될 것이냐, 아니면 더욱 구세주가 될 것이냐는 역사만이 결정할 것이다. 모든 역사는 인간의 품성과 비인격적인 운명과의 투쟁이므로. 그리고 우리는 그 둘 중의 어느 것이 주어진 찰나에서 보다 강력한지 확실히 알 수 없으므로. 미래를 어느 한 쪽의 완전한 승리가 되는 것으로 읽으려는 어떠한 역사 철학에도 다소 과장이 있다. 도덕가가 마르크스적인 계급찬양에서 부도덕한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거기에는 자기 본위와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다. 자기 본위는 현대적 상황에서 좌절된 자아의 보상임이 분명하다. 직접적인 상황에서 그 인간적인 의미와 중요성이 파괴당한 계급이 스스로를 역사의 미래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계급으로 선언한다. 그것은 계급을 神化하게 하고 또 우스꽝스러운 신비적인 곳에까지 이르지만, 주관적인 면에서는 현재의 사회적 열등에 대한 이해할 만한 반동이며,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사회를 재건하는 과업에 있어서 무산계급이 가지는 전략적인 중요성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다.

문명의 제한에서 오는 고통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 말고 누가 그들보다 한 문명의 참 성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들 자신의 생활에서 낡은 사회적 실재의 파산을 경험한 사람들 외에 어느 누가 꾸밈없는 말로서 사회이상을 진술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삶에서 굶주림과 복수와 성스러운 꿈이 한데 어울려서 폭풍같은 열정을 일으키는 그런 사람들 외에 누가 그들보다 더 창조적인 활력을 가지고 낡은 것을 때려부수고 새 것을 건설할 것인가?


라인홀드 니이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중에서


너, 어디 있나?





2
해답은 없다


참 생명의 참 고향을 물어 물어 찾아 가자. 너, 어디 있나? 길 찾아 나서자. 소를 찾아 나서다 소 발자욱을 보다 소를 보다 소를 붙잡다 소를 길들이다 소를 타고 집에 돌아오다 소는 잊고 사람만 남다 사람과 소를 함께 잊다 근원으로 돌아가다 저자에 들어가 손을 내리다. 콧구멍 없는 소. 거울이 비었다. 이리 오너라! 너, 거기 있나? 대답하고 용서하고 타이르고 매듭짓고 풀어 헤치기, 다시 만나기 부딪치기 비우기 닦기, 얘들아 일어나라, 내가 깨어 너를 깨우기, 내가 너를 살리고 네가 나를 살리기, 내막을 밝혀라, 전모를 파헤쳐라, 뱀이 하는대로 내버려 두지 말라. 함께 함께 신이 내려 올라 들려 나서 감고 풀고 춤추고 노래 불러라. 광대 그리스도 사제 즉 무당.

하나의 씨앗에 온 우주가 우주의 첫 울음소리부터 길고 머나면 미래가 다 들어 있고, 삶과 죽음이 미움과 사랑이 선과 악이 기쁨과 고통이 만나고 헤어짐이 하늘과 땅이 밝고 어둠이 물과 불 흙과 돌 즐거움과 괴로움이 이단과 정통 신과 악마 죄와 구원이 지옥과 천당이 아름다움과 추함이 고상함과 경박함이 귀하고 천함이 씹과 사랑 신성과 세속 혼과 육신 앞뒤 겉속 안팎이 다르고 같음이 만날 때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것이 만남의 고통과 이별의 기쁨이 네 죄 내 죄 알고 모름이 끄떡임과 도리질이 벌건 대낮과 깊고 푸른 밤이 무덤과 자궁이 개소리와 부처님 말씀이 번뇌와 해탈이 진흙과 연꽃이 콧구멍과 고삐가 있고 없음이 죽음에 대한 괴이한 사랑과 생에 대한 끝없는 분노가 밥과 똥이 일과 놀이가 거지발싸개와 TV Bra, 美術과 迷述이 싸움과 평화가 전쟁과 장사 황금의 꽃 같이 빛나던 옛 맹세와 허공 속에 묻힐 그 약속이 양심과 시국이 침묵과 참여 오른손과 왼손 꿈과 좌절 울고 웃음이 총체와 나뉨 독차지와 나눔 모임과 흩어짐이 왼쪽 양말과 오른쪽 양말이 참과 거짓이 옳고 그름이 그들에게 假面을 던져라, 그러면 진실을 말할 것이다 탈과 복면이 드러내고 감춤이 精通과 짐작이 정책과 술책이 전략과 계략이 해답과 물음이 迷題와 解題 삼불과 다비 해방과 구속이 분리와 통일이 묶임과 자유 획일화와 다원화 神託과 술주정뱅이의 미친 하늘노래 玄關과 渡江이 제물과 뇌물이 시왕굿과 정토굿 입구와 출구 고임과 혁명 극락정토 칼산지옥 검은 고독 흰 고독 너와 나 주와 객 모와 순 공과 색 음과 양이, 구별없이 차별없이 분별없이 다 들어 있다 들끓고 있다 뒤척이고 있다 살고 있다 죽어가고 있다 다시 태어나고 있다, 흐른다 흘러. 말하기는 쉽다만, 제가끔 찾고 잊고 버리지 못하면 喝.

전세계적 전우주적 전인류적 세계는 하나, 해도 내밥 네밥 있는 놈 없는 놈 웃는 놈 우는 놈 죽일 놈 살릴 놈 경우지게 따로 있고, 누런 놈 붉은 놈 검은 놈 하얀 놈 틀림없이 달리 있고, 땅모양새가 틀리고 물맛이 다르고 춥고 덥기가 각각이니 입고 먹고 생각하고 느끼는 방법 묘법 기법 작법이 다른 법.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랑이 다르랴, 고통이 없으랴, 그리움을 모르랴, 하늘을 모르랴. 내가 하늘이다 하늘이 나다 한울을 내몸에 모셨다 후천개벽이다, 아무리 쓰고 뱉고 우겨싼들 그거 다 행하지 않으면 빛좋은 개살구요 그림 속에 떡이요 꿈 속에 고향이요 죽은 자식 나이 세기. 이를 두고 어떤 현미경은 “병은 병균을 둥근 테 안에 넣고 보는 시인.”이라 했,
뭐얏?
헤헷.
다시,
이를 두고 어떤 병균은 병은 시인을 둥근 테 안에 놓고 보는 현미경?
다시!
이를 두고 어떤 둥근 테는...
에잇! 또, 다시! 다시! 다시!
예까지 왔다면 이제 알아 먹겄다.
이를 두고 어떤, 어떤 한 시인은 "병은 병균을 둥근 테 안에 놓고 보는 현미경."이라 했거늘.

예술이 생의 의미를 찾는 일이거나 사회정의를 일깨우거나 일종의 오락 혹은 심미적 즐거움을 도모하거나, 생을 둘러 싼 온갖 환경과 조건에 動하는 物로서 그 모든 것들과 상호의존하는 人으로 間을 관계 맺는 뒤얽힌 감각과 생각이 불필요한 간극을 가진 매체의 영역을 넘나들며 제 나름의 존재양식과 세계관을 밑둥 삼아 생의 여러 양상을 보는 방법과 감수성을 드러내는 바,

제반 공연예술과 소위 행위예술의 중요하고도 어려운 차이점은 이러한 작품들의 힘은 모종의 전달이 아니요 어떤 체험이 되고자 함에 있으므로 하나의 작업이 완성되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기 위해 던져지는 장소에 있는 한, 行을 爲하는 일에는... 마침표가 없다!

해답은 없다! 다냐? 물음이 없다! 다다.


김영화의 [供演이라] 중에서





3
아버지, 인생이 뭐예요?


아빠, 인생이라는 게 뭐야? 아버지께서는 허허 웃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더니,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고야 마는 것, 그것이 인생이지. 그후 세월이 흘러 나는 사춘기가 되었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온통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아버지, 인생이라는 게 뭐예요? 아버지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더니 머리칼을 길게 쓸어 넘기시며 나직이 말씀하셨습니다. 원한다고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란다. 끝내는 이룰 수 없는 일도 있지.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일. 인생이란 그런 것이란다... 나는 지금 내 뜨거운 눈물 너머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있습니다운운. 오래전에 얼핏 들은 유행가의 대강 추린 내용이다. 쓰다. 삶의 온갖 고초를 다 겪고 이제는 불혹을 한바탕 넘겨버린 어느 시인마저도 격식 갖추지 않고 새삼스레 묻는다. “참으로 삶이란 무엇일까?”

참으로 삶이란 무엇일까? 노을 찢긴 들녁에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 한 마리. 뭐라 이름 붙일 길 없는 곳을 향한 모진 그리움. 절대적 구원의 손길에 대한 끝없는 갈망. 지지않는 태양 천년왕국이 찰나에 무너지는 허망함. 그를 따르는 생에 대한 처절한 배신감. 슬프디 슬픈 슬픔이요 아프디 아픈 아픔이요 터지는 기쁨이요 숨막히는 고통이요 피끓는 분노요. 너무나 서러워서 아름다운 서러움이라느니 너무나 아름다워서 서러운 아름다움이라느니 밑모를 무의식이라느니 끝모를 죄의식이라느니 밑도 끝도 없는 허무의식이라느니. 미칠 듯한 그리움에 여윈 풀이라느니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라느니 가리라 이제 떠나 가리라 울부짖는 저 머나먼 벌판 벌거벗은 고통 속으로라느니.

사랑이라는 것은 건드림이니 참사랑이란 사랑하지 않음이라 아무리 타이르고 윽박질러도 덮어두고 감출 수 없는 세 가지. 재채기, 사랑, 나이. 사랑하오 사랑하오 울부짖고, 그리워요 그리워요 몸부림치고, 가지마오 가지마오 진저리치고, 젊은 것들은 삶의 의미를 묻는다고 아스팔트 바닥을 코로 훔치고, 권세 있는 것들은 사람의 고기맛에 취해 널브러지고, 권세 없는 것들은 뜻도 모르는 노동에 지쳐 쓰러지고.

나고 죽는 물결 따라 빛과 소리 물이 들고 심술궂고 욕심 내어 온갖 번뇌 쌓았으며 보고 듣고 맛봄으로 한량없는 죄를 지어 잘못된 길 갈팡질팡 생사고해 헤매면서 나와 남을 집착하고 그른 길만 찾아다녀 여러 생에 지은 업장 크고 작은 많은 허물. 어화, 인생살이 징역살이 고통바다 괴롬바다 눈물바다. 산다는 것이 낚싯대 끝에 걸린 메기꼴과 무엇이 다르랴.

잠시 중학교에서 선생질을 한 적이 있다. 얼굴 그리기. 사람 만들기. 마음 그리고 쓰기. 얘들아, 얼굴이 뭐지? 얼굴이 얼굴이죠. 그래, 맞다. 얼굴이 얼굴이지. 호랑이가 들어 있으면 호랑이굴, 토끼가 들어 있으면 토끼굴, 얼이 깃들어 있으니 얼굴. 그런데 그 있어야 할 얼이 없으면, 얼빠졌네 넋을 잃었네 혼이 나갔네 하지 않더냐? 그러면 얼이란 무엇일까? 얘들아, 사람이란 게 뭐냐? 모르겠는데요. 사람이란 살다 살음이란 말이 줄어 삶이란 말이 되고 또 그 말이 다시 늘어 사람이라 그런단다. 우리가 흔히 교육이란 사람 만드는 일이라고 하지 않더냐, 그리고 또 그 사람 됨됨이가 어떻더냐 그 사람 그릇이 어떻더냐 하지 않던? 그처럼 됨됨이나 그릇은 다 된 모양이 어떻게 생겼느냐는 말인데 선생이 되다, 화가가 되다, 중이 되다라고 말하지만 그 말 보다는 선생을 이루다, 화가를 이루다, 중을 이루다라는 말이 더 그럴 듯하지 않을까?

마음을 마음대로 마음껏! 아이들은 그림 그리기를 두려워하기조차 했다. 더러운 교육 탓이다. 그래서 제 마음 가는대로 제 마음껏 아무렇게나 마구 그린 듯한 그림, 소위 추상화라는 멋진 세계도 있다는 것을 체험케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주제도 마음이라는 그야말로 추상적인 것을 제시하고 그 마음을 도화지 뒷면에 설명하라고 했다. 이율배반이다.

예상 밖의 일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심장이 단순화된 모양을 지그재그 좌우로 갈라놓고 각기 대비색을 사용한 다음, 내 마음에는 선과 악이 있어요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선으로 가라 하시지만 난 자꾸 악에 끌려요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선 쪽으로 가야겠지요. 그들 생각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마음은 의심할 여지없이 심장에 들어있고, 선과 악은 확연히 갈라져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대립의 관계라는 것이다. 선과 악의 피할 수 없는 충돌, 그에서 뒤얽히는 갈등, 그의 통일을 위한 투쟁의 길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나 어차피 선으로 가야하겠지요?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모두들 그렇게 말하니까요.

그래,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실컷 괴로워 해야지.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 어쨌거나 실기수업이므로 해서 언제나 다음 시간 준비물을 예시해 주고는 했다. 마지막 수업시간. 다음 시간 준비물 : 겨울 거울. 겨울 거울이 뭐예요 선생님? 겨울 거울이 뭐예요? 문방구에서 팔아요? 그래, 내 새끼들아 사랑한다.


천리향도 시들고
동백도 자취없다

가슴은 마당 복판에서 두근거리고
발은 이미 대문을 나선다

현수막 현수막
찢긴 포스터들 어지러운데

홀로 샘물 길러 간다
내일 마실 물.


김지하의 [겨울 거울7]


세상살이가 어떻소? 마음에 들지 않소.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 몽중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소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에 등불이라. 씹던 닭뼈를 개에게 던져주며 벌거벗고 제 에미 앞에서 울부짖던 경허선사, 빈 거울. 콧구멍 없는 소 한마디에 피를 토하며 우주를 뒤집는다.

우습고도 우습도다. 소를 타고 가면서 소를 찾는 짓이여.





4
돈이시여, 하늘이시여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 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 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 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 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 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겠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박노해의 [하늘]


살아있는 것이 무서웠어. 오직 살아있다는 것이... 교회에 갔었지. 그들은 누구에게나 형제여! 부르며 따뜻하게 손을 잡아준다기에... 절에 갔어. 부처를 섬기면 온 세상이 부드러워진다기에... 멀리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 아무리 복잡한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들끓어도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적막함. 세상과 나는 아무런 접촉점이 없다는 불안한 격리감... 피붙이들조차도, 친구들마저도... 하나님은 곧 관계성이다. 맞는 말이지. 그 관계를 알아차리는 일이지. 부처를 섬기는 것이 곧 나를 섬기는 일이요 나를 이루는 일이라... 헌데 예수도 부처도 돈이 있어야 믿겠더란 말이 어처구니 없게도 사실이었어. 뿌리깊은 소외감. 그것이 곧 가난에서 자란다는 진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지. 참으로 쓰라린 경험이었어. 이제 나는 이 모든 고통의 뿌리가 무엇인지 확연히 알게 되었을 뿐. 언젠가 내 가까운 친구가 덤덤히 들려준 이야기다.
종교. 영어로는 이 말에 '마지막 동앗줄'이라는 속뜻도 있다고 한다. 또 어느 종교가는 종교란 절대성에 대한 느낌이라 말한다. 그런데 인간의 이 절대성을 향한 그 마지막 동앗줄마저도.

요새 밥 굶는 사람이 어딨어?
요새 자가용 없는 사람이 어딨어?
요즘 세상에 학비 없어서 대학 못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도대체 이해할 수 없어요. 죽을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일을 해서 돈을 벌 것이지 왜 이리 세상을 불안하게 만드는지.
그래서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하셨느니라.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기 보다 어려우니라. 가난한 사람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 그 사람 것이니라.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혁명가라고 생각합니다.

있는 것이 대물림이라면 없는 것 역시 대물림이라. 가난이 게릴라처럼 쑤시고 들어와서 굶주림이 칼이 되어 등에 꽂힌 채, 두 칸 방에서 한 칸 방으로 전세방에서 월세방으로 지상에서 지하로 바닥에서 산꼭대기로 철거에서 철거로...
이제 벼랑끝이다! 아버지, 우리는 안 죽이는 거지?
제 처자식을 목조르고 나도 조르고.
돈 내놔라! 새끼가 애비를 찌르고.
빚 갚아라! 조카가 삼촌을 죽이고.
복수하자! 엑셀레이터를 힘껏 밟고 여의도 광장을 누비고.
쌀값 보장하라! 미국쌀 수입 저지하라! 모진 밥줄 더 이을래야 이을 수가 없구나.
농약을 제 목구멍 속에 쑤셔 넣는다. 쑤셔 넣는다.
피바다...

없는 놈은 술도 못 마신다더냐! 캬바레에 석유통을 내던지고.
육실헐 세상, 힘들어서 일 더 못하겠다. 노동 삼권 보장하라! 뼈만 남은 육신에 기름 부어 불에 타죽고.
불바다...

금융실명제? 안돼 안돼 절대 안돼 금융실명제 절대 안돼! 안되게 돼 있소이다.
토지과표현실화? 반대 반대 결사 반대 토지과표현실화 결사반대! 이하동문.
높다보니까 힘깨나 쓰게 되고 돈은 자연히 따르는 법.
똥바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경쟁의 사회다! 등쳐먹고 속여먹고 뺏아먹는 약육강식의 자유가 에이즈로 창궐하는구나. 있는 놈들 너무 처먹어 배 터져 죽을 지경, 없는 놈들 먹을 것 없어 등 터져 죽을 지경. 있는 놈들 돈더미에 파묻혀 흥청망청, 부르다가 죽을 이름이여 돈이시여 하늘이시여. 없는 놈들 빚더미에 짓눌려 허둥지둥, 부르다가 죽을 이름이여 돈이시여 하늘이시여. 정말이지 산다는 게 이따위 것이냐?

세상살이가 입 열어 말 건넬 이 있고 마음 열어 손 잡을 이 있어야 하건만, 눈에 당장 보이고 손으로 당장 만질 수 있는 것이 하느님인 세상, 돈을 섬기느라 얼 빠지고 넋 잃고 혼이 다 나가버린 세상, 그 됨됨이고 그릇이고 다 그른 세상에 그 마음 씀씀이인들 오죽하랴.

ㅡ평생 고생해봐야 서울사람 밥농사나 짓는다는 소린 들어넘길만 했다. 농축산물 수입해 일년 키운 돼지새끼를 암매장하면서 아직 기회는 있다고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엊그제 옆집 애들 둘이 농약 먹고 세상 하직하는 꼴을 보고 짚히는 게 있었다. 지들 부모 일년 농사 지어봤자 압구정동 빤쓰 한장 값도 안된다는 사실을 그 애들이 알았음에 틀림없다. 숨겼어야 했는데 아는 게 병이었다.

도대체 이게 사람세상이냐, 개뼉다귀 세상이냐? 하늘이냐, 똥구멍이냐? 에퉤퉤퉤퉤퉤 퉷! 썩은 세상! 누군가 글로써 사방으로 원수만 맺었다더니 참으로 돈으로써 세상과 척을 지어서 진실로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마음 하나가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구나.

쌀이 있으면 팥을 꾸어다 떡을 해먹을텐데 땔 나무가 없소이다.
에라이, 쌍놈에 세상!





5
사회주의 이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다”는 사회주의 이상은 기독교에서 사랑의 이상이나 불교에서 자비 정신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사회에서는 철저하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합리적인 사회로서 움직여 나아가야 할 하나의 올바른 이상이며 사회의 총체적인 재조직이 그 이상에 접근할 수 있을 만큼 이상성을 재조직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오직 역사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다. 평등주의적 이상이 순수한 윤리적 상상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무산계급적 생활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나온 결과라 해서 추구해야 할 긍정적 사회이상으로서의 타당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산계급이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엄격한 평등주의자가 된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 억지로 떠맡겨진 역사적 임무로서의 평등권을 가졌기 때문인지는 뚜렷이 알 수 없다. 두 가지 요소가 다 그 이상을 형성하는데 들어갔을 것이다.

지나온 과거의 모든 사회는 그 사회조직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들로부터 별다른 저항없이 사회부정이 행해졌으며 또 영속시켰다. 고대에는 노예폭동이 있었고 중세기에는 농민반란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간간이 있었던 일이고 또 도대체 효과가 없었다. 그것은 배고픈 사람들의 반항적인 열정을 표시하는 것이었는데, 이 굶주린 사람들은 그들의 노력에 권위와 지속적인 힘을 줄 만한 사회철학도 없었고 또 그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알맞은 정치적 전략도 없었다. 평등주의적 이상주의, 적대적 영웅주의, 반국가주의와 국제주의 그리고 자기들의 계급을 의미깊은 역사적 공동체로서 찬양하는 것, 현대 노동계급의 이 모든 대자적인 사회적 태도는 공업 시대의 산물이자 어느 만큼 민주주의 운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현대 기술문명의 대두는 소유와 권력의 집중화를 촉진시켰으며 소유주의 책임감을 파괴했고 개인 노동자를 매스 속에 소실시켜 버렸다. 주식 소유의 기구와 대량생산의 기술에 의한 산업관계에 있어서 인간적인 요소를 애매하게 만들고 인간관계를 기계적, 즉 냉혹한 현금지불관계가 되게 함으로써 인간활동의 경제적 동기를 확연하게 증대시켰다. 경제적 인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산 실재가 되게 한 것이다. 더욱이 그 생산방법과 통신수단의 발달은 사회적 유대를 고도로 강화시켰으며 노동계급 안에서 소유계급의 지배를 더욱 중앙집권화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은 일정한 경제적 지위를 가진 개인들을 더욱 분명하게 하나의 자의식적인 사회적, 정치적 집단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그리고 그들에게 공동의 집단적 이해관계를 표시할 수 있는 기관을 줌으로써, 계급간의 알력과 반목을 강화하였다.

복잡한 사회는 정치적 힘이건 경제적 힘이건 언제나 위험할 정도로 권력을 집중시킨다는 것, 그리고 경제적 힘의 응집은 경제적 힘을 가진 경계심 많고 강력한 국가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다는 사실, 그러한 대결에서 나타나는 특권이 권력과 결부되어 있으며 또 생산수단의 소유가 어떻게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중요한 권력인가를 보고 있다. 평등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통해서, 사유재산이 사회적인 속에서는 어디서나 이루어진다. 사유재산의 파괴, 즉 권력을 파괴함으로써 사회부정의 진정한 근원이 힘의 불균등이었음을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가난에 대한 동경, 평등과 자유에 대한 열정, 사회부정의 인식, 그것을 제거하려는 욕망이 사회주의는 아니다. 기독교와 기타의 종교들에서 보이는 부에 대한 정죄와 청빈에 대한 존경이 사회주의도 아니다. 현대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와 그 계급적 대립의 아들이다. 이것들 없이 그것은 존재할 수 없다.”

권력의 탐욕과 야수성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사회 안에 특정한 힘이 존속하는 한, 그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윤리적 자제를 하게 해야만할 필요성을 버릴 길이 없다. 그러나 계급적 특권에서 솟아난 사회부정이 순전히 도덕적 설득에 의해 없어질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사회부정으로부터 가장 많이 고통을 당한 무산계급이 수세기 동안의 헛된 소망이 좌절된 끝에 도달한 확신이다.

사회주의 이념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신경질적인 종말론적 집념도 아니고 사유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인류의 달콤한 유년시대인 원시공동체사회를 꿈꾸는 일도 아니다. 계급투쟁이라는 냉혹한 역사발전 원리가 사회주의 이념을 관통하는 중대한 요소임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ㅡ노동해방이란 ㅡ> 국민을 착취하는 자본가가 없어지고 땀흘려 노동하는 노동자가 우대받는 세상, 노동 속에서 참 삶을 느낄 수 있고 모든 문화생활을 공동으로 누릴 수 있다.
축. 101회. ’90. 5. 1
현중골리앗 동지들의 한마디 낙서판
축 노동해방

사회는 진보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존립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큰 평등을 요구한다. 어느 시대에서나 낡은 질서의 질곡과 억압에 짓눌려 천대받던 사람들은 모두 다 올바른 세상을 꿈꾸었다.





6
혹시는 틀린 길 위에서,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ㅡ소련, 동유럽의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지만, 사회주의자들이 꿈꾸었던 사회주의 이상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 또는 영원히 실현불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은 계속 남는다. 이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얻는 것은 앞으로 우리 역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와 무관하지 않다.

ㅡ자유와 평등, 인간의 완전한 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의 이상은 지금 중대한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억압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완전한 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이상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ㅡ근대적 반자본주의 운동은 1871년의 파리 코뮌의 패배와 더불어 그 첫 역사적 좌절을 맛보았다. 그리고 오늘날 소련에서의 퇴각을 통해 그 두 번째의 그러나 더욱 참담한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또 파리 코뮌이 볼셰비키혁명 속에서ㅡ물론 질적인 차원을 달리하면서ㅡ 다시 한 번 되살아 났음을 환기시키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소련사태가 공산주의의 영원한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성급하게 단정지어 버린다면 그것은 비역사적이고도 근시안적인 관찰 태도가 될 것이다. 역사발전은 단선적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혁명과 퇴행 그리고 진화를 반복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회주의적 실천노선이 현재 영원한 몰락이 구가될 정도로 퇴조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퇴행의 시기는 이따금 도약을 위한 웅크림의 단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뼈를 깎는 자기비판과 성찰의 계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 소련사태가 던지는 가장 커다란 역사적 교훈이다.

ㅡ자본주의가 신주처럼 받들어 온 경쟁에 의한 효율성의 향상이라는 원리가 오직 자동차 생산이나 쇠고기 수입에만 한정될 이유가 없다. 체제의 생존과 성장에도 마땅히 적용되어야 한다. 예컨대 독일의 파시즘이 체코를 강점했을 때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제국주의가 월남에 융단폭격을 감행할 때에는 그래도 항의해주는 '한쪽'이 있었다. 탱크를 앞세우고 세계분할에 나서는 만용을 거듭할 수는 없겠지만, 우르과이라운드협상 따위를 내세워 세계시장을 점령하려는 독점자본의 횡포가 사회주의라는 견제세력이 소멸된 다음에 한층 더 극심해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공산당의 일당 지배라는 두 명제의 폐기로 레닌주의의 기둥은 이미 이론적으로 와해되었으며 민족문제를 경솔히 처리하고 관료주의의 위험을 도려내지 못한 실수로 레닌의 유지는 현실에서도 난파하고 말았다. 혁명적 실천의 수단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약화는 피할 도리가 없겠으나, 자본주의 체제의 이론적 대안으로서의 생명력은 그만큼 강인해진다는 뜻이다.

ㅡ제3세계 국가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전략을 선택하도록 도움을 준 구체적 조건들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것을 선택하도록 강요한 조건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되고 있다. 문제는 사회주의적 발전인가 자본주의적 발전인가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자립'인가 자본주의적 '종속'인가의 선택이다. 단순한 경제발전만이 아니라 생동하는 진정한 민족주의까지도 모색하는 제3세계 국가들은 다른 제3의 선택이 없다.

ㅡ마르크스주의는 이미 사회와 역사의 다양한 분화에 대응하여 여러가지 수정과 자기부정을 거쳐 불가피하게 변질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우리나라에서는 고전 전통의 낡아빠진 마르크스ㅡ레닌주의인가? 남북관계, 대미종속, 파쇼체제 등에 관련이 있겠으나 중요하게는 농촌붕괴와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산업노동자 및 근로대중 전체의 열악한 삶에 그 바탕이 있으며 특히 산업화의 촛점이 제조업부문에 집중되어 있어 제조공업부문에 역사적 토대를 두고 있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와 관련된 구소련의 레닌주의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선호하게 된 것 같다.

ㅡ사민주의는 사회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모형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그 문제점을 국가기능으로서 수정·보안해 나가는 정책적 개념이다. 따라서 사민주의는 자본주의가 체제 수준에서 내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근원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 바로 여기에 사민주의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점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를 가능한 하나의 대안으로 놓고 그 수용 가능성을 검토하자는 입장을 폐쇄적으로 대해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를 통해 전환기적 상황에서 문제를 보다 빨리 해결하는 길은, 논의를 백가쟁명식으로 충분히 자유롭게 조직하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가 이제는 참으로 운동권 내에서부터 보장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ㅡ정권과 자본의 집요한 탄압으로 노동운동이 잠시 위축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실제로 87년 이후 숱하게 배출된 선진노동자들과 일반노동대중의 엄청난 잠재력이 전노협의 조직역량과 맞물리게 되면 상당한 폭발력을 보일 것이다. 이젠 구호적인 조직 강화가 아니라 일반조합원이 요구하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조직강화가 필요한 때이다.

ㅡ최근 노사협의회에서 사측이 그 쪽 이야기를 하며 회사가 안정되어야 한다면서 노조활동을 적당히 해줄 것을 요구한 적이 있다. 그 쪽은 그 쪽이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다. 당장 우리 노동자들의 생계와 주거문제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것이 많은데 우리가 하지 않으면 사측이 해결해주겠는가. 뻑하면 노동자나 잡아 가두는 정부에게 무얼 기대하겠는가.

ㅡ지배세력은 현존 사회주의 실패를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로 규정하면서 냉전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구제질서, 즉 권력화되고 있는 세계질서에 편입되기 위해 ‘개방과 자율’이라는 정책방향을 더욱 과감하게 밀고 나갈 것이다. 또한 이 개방과 자율를 뒷받침하고 있는 유일한 동력인 양질의 저임금노동력을 계속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이를 체계화시키기 위해 개량과 통제라는 이중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갈 것이다. ‘임금의 한자리수 동결’이라는 자의적 이데올로기 대신에 더욱 설득력을 확보할 ‘국제 경쟁력 확보를 위한 임금인상 동결 및 생산성 범위 내에서의 임금조정’ 그리고 이를 위한 ‘총액임금제’의 도입을 추진할 것이며 노총 등 노동진영의 일정부문의 요구를 수렴하는 형식으로 노동관계법의 부분적인 개량적 수정을 감행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양면의 공세가 감행될 경우 지배세력은 상당한 대중적 설득력과 지지를 획득하게 될 것이지만 민족민주운동진영과 민주적 노동운동진영의 입지는 정치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점차 축소되어갈 것이다. 이 역사적 역류를 헤쳐나갈 길은 무엇인가?





7
건너온 다리


고대 중국에서는 장자가 살았던 송나라의 민족을 언제나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조롱했듯이 유럽에서는 폴라드인을 대체로 그렇게 취급하는가보다. 내막을 알고보면 기가 막힌 일이지만 좌우지간, 그래서 우스개 소리에 폴란드인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두 폴란드인이 여행중에 길을 잃었다. 난감한 일이다. 나아갈 길을 바로 잡으려면 현재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법. 부랴부랴 허둥지둥 헐레벌떡 지도와 나침반을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고 이리 재고 저리 잰 고심참담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한 사람이 희색만면하며 무릎을 치면서 제 동반자에게 소리쳤다. “아, 이제 알았다. 저기 저 두 번째 산봉우리 보이지? 그 오른쪽 옆구리에 튀어나온 큰 바위 보이지?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이 바로 저기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바로 저기?

찢어 죽이자!
처단하라!
물러가라!
철폐하라!
분쇄하라!

단언한다. 그로 인해 찢겨죽고, 처단되고, 물러가고, 철폐되고, 분쇄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진작에 그렇게 온 몸으로 부르짖었던 당사자들이 분쇄되고, 철폐되고, 물러가고, 처단되고, 찢겨 죽었다. 대부분이 그랬다. 진실로 우리는 무언가를 피범벅이 되도록 짓밟을수록 실제로 우리는 그 무언가로부터 피반죽이 되도록 짓이겨지고 있다.

오늘도 ‘굴원이 돌덩이 안고 빠져 죽은 날’ 인간의 역사란 끝내 그 정도일 뿐일까? 우리가 어제 있었던 곳이 바로 저기였으면, 우리가 오늘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사회임을 자각하여, 우리가 내일 있을 곳이 바로 거기이어야 하기 위해서는?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누구의? 밭도 갈지 않고 씨를 뿌릴 수야 없지 않은가. 더구나 곡식 알갱이는 주인 발자욱 소리를 듣고 여문다 하지 않는가. 칼 뒤에 칼 있는 법. 가지 찢어진 게 어찌 뿌리 시든 탓일까.





8
예술가들이여, 어설픈 양심을 버려라


‘노동해방사상’에 입각한 ‘노동미술’에 ‘복무’하겠다고 나선 한 후배가 “노동을 해 본 경험이 없어서...” 어떻게 노동미술이라는 꼬리표에 걸맞는 그림을 그려야 할지 난감하다는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선생도 노동자냐?”고 핏대를 올리던 고상한 임금노예 교감선생들이 떠올리는 ‘기름때 절고 땀내나는 불쾌한 사람’쯤으로 노동자를 여기고 있음이다. 그 후배가 그리도 즐겨 쓰던 '한줌도 안되는'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물론 이 말은 자본가계급이나 지배계급을 수식하는 역사적 전통에 빛나는 말이다. 그 한줌도 안되는이란 말을 한마디쯤 해야 속이 후련했을 한가마니쯤 되는 사람들이 되뇌인다.

노동자계급. 자본가계급.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 노동해방. 계급투쟁. 사회주의혁명. 당파성. 현실주의. 쁘띠부르주아적 민족주의. 쁘띠 부르주아적 민중주의. 민족적 민중주의. 민중적 민족주의. 맑스ㅡ레닌주의. 수정주의. 개량주의. 기회주의. 대중추수주의. 꽁무니주의. 경제주의. 유물론. 관념론. 변증법.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NDR. PDR. 좌익소아병...

이제는 사회과학 고전들에 대한 정확한 우리말 번역이 없는 혼란상태를 어느 만큼 극복했겠지만, 예컨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좌익소아병, 즉 childness는 어떠한 경우에도 병이 아니므로 좌익유치성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니겠느냐고 지적하는 이도 있다. 또한 노동당이 현존하지 않는 상태에서 어떻게 노동계급의 당파성을 운위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관점에 선다는 것 자체가 바로 노동계급의 당파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비교적 많은 이들에게 합의된 듯이 보이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현단계 한국사회 성격을 규정하는 범주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질 수 있겠다.

이른바 '유물론적 세계관과 창작방법의 변증법적 연관관계'를 여지없이 입증하면서, ‘창작을 통한 실천’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예술가들이 사회과학도나 정치경제학도의 이론적 실천을 위한 실천적 이론에 대한 모색사업을 앞지를 수 있겠는가라 묻는다. 앞지르기는커녕 뒷꽁무니 따라잡기조차 힘들다고 말한다. 사실이 그렇다. 현실의 구체적 세계정세와 관련된 현 국내정세를 적확하게 판독해내기란 그 방면의 전문가들조차도 힘든 일임에는 틀림없을테니까 말이다.

그렇다한들, ‘현실주의’를 앞세우는 여러 갈래의 예술영역이 현 정세를 날카롭게 분석하면서 현 정책의 허실을 낱낱이 폭로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극명하게 예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현실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사상과 인간의 사유과정을 통해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 현실의 실질적인 연관과 법칙은 무엇인가라는 이론, 그러면 현실을 어떻게 변혁할 것인가라는 방법에 대한 철저한 과학적 사회철학에 대한 탐구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과학의 목적은 현실의 운동을 보다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것이므로 해서, 흔히 과학은 ‘현실로 부터 출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현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인가?

모든 정치적·사회적·도덕적·종교적 문구, 전제, 선언의 배후에 숨어 있는 특정계급의 이해관계를 찾아냄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을 위한 장치와 문화의 모든 도덕적 위선을 벗겨내고 그들의 도덕적 설득이나 정치적 압력도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 과업으로서 적당치 않다고 거부하는 지점에서, 이 시대의 진보적 예술가들이 노동계급의 당파성에 입각한 현실변혁을 도모하는 '사회주의적 현실주의 예술'을 주장한다면, 유물론적인 현실인식이 필요함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복잡하고도 다양하게 뒤얽힌 현대생활 속에서 ‘경제적 범주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추상화시킨 이론적 표현일 뿐’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피상적으로 보여지는 계급의 다층화나 현상적으로 보이는 생산수단의 다양화는 사회발전의 토대이자 사회혁명을 위한 중심축인 사회의 경제적 관계를 ‘단순하게’ 다원화시켜 버린다. 그러나 사상의 역사는 바로 물질적 생산이 분화하는 정도에 따라 그 성격을 변화시킨다는 사실 속에 자리잡은 모든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항상 지배계급의 사상이었다는 진실을 외면하는 지점, 바로 그곳에 다원주의 진정한 매력과 함정이 있다. 그러므로 현실의 주체적인 경제적 범주에 대한 과학적 분석 없이 조직된 사회개혁사상은 ‘유물론에서 솟아나오지 않은 공허한 사회주의’로서 이는 마치 인체생물학에 대한 기초 지식도 없이 사람의 병을 고치려 덤벼드는 돌팔이 의사의 어리석은 만용, 그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누군가 모더니즘이 무엇인지 깨우치기도 전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출현했다고 개탄하더니만, 바로 물질적 토대를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는 문화예술영역에서의 일이다.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에 대한 의식적인 동조라는 진보적 예술가들의 사회철학이 그 자신의 직접적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고 노동계급의 경험과 필요들에 대한 상상적인 이해에서 나온 개인적인 견지일지라도, 기실 노동계급문화예술에 투신한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제 살아온 개인적인 쓰라린 경험과 제 겪은 온갖 고통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밝아진 눈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제 모든 것을 걸고 처절하게 투쟁해온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탁월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시본래 예술가들이란 남의 집 지붕 아래 집짓기 싫어하는 사람들인지라 이런저런 문화예술단체가 존재한다하더라도 그리 조직적인 힘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어차피 예술은 직관이다? 모종의 직관은 오직 예술가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오히려 분명하고도 확실하다는 과학자들이 자신들 과업의 대부분이 상상과 환상의 부산물이라 고백하고 있다. 그래도 예술은 예술이다? 이는 ‘빈곤의 예술을 논하고자 하는 예술의 빈곤’을 타개하기 위한 유일무이하고도 전능한 대답은 아니다. 예술가들은 예술적으로 현실에 집착한다? 물론 옳다. “실천적으로 사실에 집착하듯이 이론적으로 사실에 집착한다”는 견해처럼 예술가들은 상상적으로 사실에 집착하므로.

해서, 현대생활의 전체적인 비극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만 발휘하면 자신의 임무를 다한듯이 믿는 구호만능주의나 정의로운 사회로의 무제한적인 약속을 남발하는 환상만능주의나 간에 ‘먼저 치고 달리는 수법’에 입각한 현실을 맴도는 현실주위주의는,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시키려는 지나친 욕망 때문에 제 자신들의 하찮은 덕들과 지배계급의 큰 악에 열중하면서 중간계급의 편견과 부단히 그리고 깊이 교섭함으로써, ‘사회주의는 현실주의가 아니라 관념주의에 의해서 그 물질적 번영이 아니라 그 정신적 약속에 의해서 그 길을 헤쳐 나왔다’는 역사적 통찰로서 현실주의 미학을 딛고 선 예술가적 양심을 온전히 보상받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예술가들이 꿈꾸는 세계란 기꺼이 공허한 인본적인 유토피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예술가들이 지향하는 새 세상이란 홀연히 현실과 과학을 넘어선 절대적 세계, 종교적 피안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있는 것으로서 없는 것을 낭패시키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 그렇다면 이제 묻겠다. 역사의 횃불이요 촛불이며 서방정토 아미타불이시며 미래에 오실 미륵불이신 오늘의 진보적 예술들이여, 이 시대의 격렬한 역사적 물음에 어떻게 올바른 대답을 할 것인가?





9
절벽에서 뛰어내려라!


허다한 생각들이 골리워진 것이 말이요 그 말이 골리워지고 정리된 것이 글이라. 문화란 글월 文과 달라질 化가 합친 말이다. 본래 化자란 사람 人변에다 그 人을 뒤집어 놓은 것을 가져다 부쳐서 사람이 죽은 것을 표시하는 글자다. 우리말에 뒈졌다라는 그 ‘뒈졌다’이다. 사람이 이루어낸 것을 글월이라 문화라할 만큼 문화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인데 왜 그런가? 사람의 생각·사상·뜻을 일으키는 일이요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마음 하나 일으켜 산을 움직인다. 그런데 그 마음은 어디서 솟아나오는가? 깊은 생각을 하자는 것이다. 뒈진다, 죽는다, 버린다, 돌아간다는 것은 질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뒤집히면서 뒤집고 뒤집으면서 뒤집히는 것이다. 무엇으로? 글월로서, 생각으로, 사상으로, 뜻으로서. 무엇을? 글월을, 생각을, 사상을, 뜻을. 무엇이? 뜻이, 사람의 큰 뜻이.

그러므로 문화의 속성에는 이미 끊임없이 변화·발전할 역전을 겪을 운명이 들어 있다. 運命이란 運數라 運轉이라 運動이라. 운동이란 무엇인가? 그저 뜻없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운동에는 법칙이 있다. 궤도가 있다는 말이다. 생명의 본질적인 흐름따라 나고 죽는 물결.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 무한히 자라는것.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 죽었다는 후에도 계속 살고 자라는 것. 끝이 시작이요 시작이 끝인 것. 끊임없이 이루어내면서 이루는 것. 세상만사 본래대로 뒤집히기 마련이요 세상만사 제뜻대로 뒤집기 나름이다. 꿈은 뒤집히면서 뒤집어야, 뒤집으면서 뒤집혀야 삶으로 구비칠테니까.

새로 머리 감은 이는 모자를 튕겨서 쓰고 새로 몸 씻은 이는 옷을 털어서 입는다. 문화운동이란 그런 것이다. 만물의 性은 피었다 시드는 법이라. 그러므로 문화가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의 상황을 중심 삼아 죽고 새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 문화는 생명력을 상실하여 지리멸렬하고도 하찮은 지점에서 멈춘다. 고이면 썩기 마련이다. 목숨을 바꿔야 한다.





10
이리 오십시오


사람은 태 안에 있을 때 우주를 알고 탄생과 함께 이를 잊는다는 말이 있다. 어머니와 태아의 이러한 한 몸이었던 관계 상황은 사람의 일생을 통한 그리움의 근원이 된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움은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진정한 생명과의 연결을 이룩하려는 힘, 관계를 이루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 그리움이란 알고보면 숨죽이고 있는 인간의 내재된 본성 바로 그것이다. 세상 모든 일은 만남으로 인해 그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조용히 기다리는 막연한 그리움만으로 무엇인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 하나의 현실로 이룩하기 위해서는 자기 쪽에서 먼저 일어서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룬다는 것은 만남으로 맺게 되는 관계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살려내는 솜씨에 따른다.

님만이 님이 아니고 기루는 것은 다 님이라. 보이지는 않으나 강렬한 힘을 발휘하는 그 무엇, 나의 모든 것을 바쳐 부르는 그 무엇, 끊임없이 나를 부르고 있는 그 무엇. 나는 ‘너’라 부른다. 너는 찾으려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너는 처음부터 나에게 우리에게 주어져 있던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이는 나의 우리들의 마음에는 애초부터 너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너를 통하여 사람은 하나의 '나'가 되는 것이다.

...... 그러나
피 되어 흐르는 제 가슴 속 깊은 그리움이 있지만 그 모두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만남을 반드시 이루면서 사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희망을 갖고 살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 그 희망을 실현하면서 사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 사람의 안타까움이 있다. “현상들의 말없는 물음. 뼛속 깊은 겨울. 새살 돋는 아픔.” 너, 거기 있나? 처절한 사랑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사람만이 또 다시 치열한 사랑을 이룰 수 있는 법. 사실이 그렇지 않다해도 진실이 그렇지 않는가. 두려워 말고 외치라!

어차피 인간의 역사란 사활을 건 절망적인 싸움일 뿐이라는 죄스러운 만족감에만 잠겨 있다면, 사회는 인간의 거대한 성취인 동시에 그만큼의 좌절로서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한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곳에,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인간의 완전한 평등, 해방, 자유는 없다라는 신념으로부터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일이야말로 그곳에 이르는 첫걸음인 것이다.

그러나 ......
아무리 많은 예술가들이 전쟁의 참화를 피로써 증언했다하더라도 인류가 존속한는 한, 국가 간이나 민족 간의 전쟁은 영원히 불가능해야 할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할지 모른다. 그들이 인간의 완전한 평등, 해방, 자유를 피로서 원한다하더라도 인간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그것은 기필코 가능해야만 할 불가능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이고 할 수 없다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루고 못 이루고도 그 정도 차이일 뿐, 죽고 사는 문제 또한 그렇다. 확신이 있으면 죽어도 우주 안에 살고 확신 없으면 동분서주해도 무의미의 사막에 떨어지는 티끌이라. 예술이다! 사람들은 파격적인 해방감을 느낄 때마다 외치곤 한다. 예술이다! 해방이란 무엇일까? 산다는 것이 낚싯대 끝에 걸린 메기꼴이라면, 예술이란 그 삶을 건져 본래 제자리로 돌려놓아 제스스로 노닐게 하는 일, 해방하는 그 구원의 손길이 아닐까?

확신한다 나는. 있는 것으로서 없는 것을 낭패시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려는 예술이란 어떤 실체의 중심에는 언제나 성스러운 꿈을 이루고자 열망하는 사람 꿈꾸는 몸, 예술가가 있었다.


그날이 오면
모든 것이 새로와질 것이다. 우선
사람과 사람 사이가 달라질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서 소나 말처럼 사서
실컷 부려먹다가 수지타산이 안맞는다고
아무때고 한거리에 내모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날이 오면 이제 어머니들은 가난 때문에
자식들을 타처로 내보내지 않을 것이며
순이는 한끼밥 때문에 술집에서
치마를 걷어올리거나 가랭이를 짝짝 벌리며
욕정의 눈앞에서 춤을 추지 않아도 될 것이다.
참말이제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기만 하면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새로와질 것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일어나 무단한 사람들을
개 패듯 패고 밟아 죽이고 잡아 가두는
쿠데타 같은 것은 없어질 것이고 대통령이란 자는
부자들과 싸우는 노동자들을 감옥에 쑤셔놓고
턱으로 판사들을 부려먹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 그날이 오면 참말이제
모든 것이 싹 달라질 것이다
토지의 농부는 봄의 언덕에 두레로 씨를 뿌리고
나눠지기 위하여
사과 하나 콩알 하나 한 쪼각까지
두루두루 골고루 나눠지기 위하여
가을에는 산에 들에 노동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그날이 오면
휠씬 잘 사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휠씬 못 사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별을 보는 사람들의 눈도 같아질 것이다.


김남주의 [노동과 그날 그날]


피로 그린 네 얼굴.
미칠 듯한 그리움.
나는 아직도 묻고 있다.
너를 그리면 너를 이루는가?






전시 너를 그리면 너를 이루는가 1992 팸플릿 전문
경북대 교지 [복현] 25호 1991 겨울










供演이라







본디 생명이란 것이 끝없이 살아 뜀뛰는 큰 한울로부터 끝없이 태어나는 하나의 큰 한울이요 온갖 재조 갖은 노력이 다 산 채로 물결치는 한 덩어리요 끊임없이 제 갈 곳을 가고자 움직이는 것이며 모든 생명의 고리와 고리들은 서로서로 이어져 있고 풀 나무는 새 짐승 벌레 사람에게 새 짐승 벌레 사람은 풀 나무에 기대어 서로 도와 사는 것이요 쉬지 않고 가로 거치는 것들을 이겨내 가없이 넓고 자유롭게 해방하며 퍼져 나가는 것, 형편이 변하면 변하는 데 따라 제 삶의 틀을 변화시킬 줄 아는 것, 수없이 났다 죽었다 하면서 옛날에서 훗날로 이어 가는 것, 종자가 비록 달라도 산 것들끼리는 서로 느낌이 오가는 것, 산 것 하나하나마다 다 제 줏대가 있어 제 째대로 제 쪼대로 온갖 모양으로 천변만화하며 끝없이 제 나름나름 창조하고 일하고 운동하면서 살고 제가 만든 것은 제가 도로 거두어 먹되 이웃과 서로 나누어 먹으며 넓게 살고 본디 이렇게 살게 되어 있는 것을, 어거지로 가로 막고 쪼개고 죽이고 억누르고 짜르고 업수이 여기고 따로따로 잡아 가두고 좁쌀알갱이모냥 좁히고 딱딱하게 굳히고 싸그리 멸종시키고 서로 미워하게 하고 서로 싸우게 하고 서로 잡아먹게 하고 묶어서 끌고 다니고 한 모양으로만 살도록 억지부리고 변화 못하게 냉동하고 제 나름으로 창조 못하게 윽박지르고 제 나름으로 일 못하게 억지 일 시키고 빼앗아 제 것 못 먹게 독차지 하고 서로 나눠 먹지 못하게 딱딱 갈라놓는 그런 장애물을 부딪치면, 그것을 되풀이 되풀이 더욱 크게 더욱 넓게 거슬러 마침내는 이겨내 제 본디 바탕대로 더욱 힘차게 물결치는 것.

김지하의 大說 [南] 중에서







세상의 일이라 하는 것이
능갈치고 사기치고 애쓰고 힘쓰고 욕먹고 욕하고 싸우고 협상하고 내자리 네자리 아웅다웅 시끌벅적 눈코를 쥐어 뜯고 부지런히 얼키고 설킨 경위를 거치며
정책이라 전략이라 들고 나니,
문화예술정책
반문화예술운동,
체제예술전략
반체제예술운동하는 가운데
민중이요 리얼리즘이요 모더니즘이요 순수요 참여요 투쟁이요 혁명이요 해방이요 전위요 다다요 초현실이요 부조리요 실험이요 무속이요 민속이요 민족이요 전통이요 正統이요 精通, 온통 왼통 북새통.
삶이요 죽음이요 슬프디 슬픈 슬픔이요 아프디 아픈 아픔이요 터지는 기쁨이요 숨막히는 고통이요 피끓는 분노요 너무나 서러워서 아름다운 서러움이요 너무나 아름다워서 서러운 아름다움이요 밑모를 무의식이요 끝모를 죄의식이요 밑도 끝도 없는 허무의식이요, 미칠듯한 그리움에 여윈 풀이라느니 울부짖는 저 머나먼 벌판 벌거벗은 저 고통 속으로 가리라 이제 떠나가리라 라느니 빈들에 외침이라느니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라느니 악을 악을 쓰는 속에
미술이 음악이 시가 소설이 연극이 종교가 춤이 노래가 뭐 그리 별스럽게 다른 동네이름이라고 미술 따로 있소, 음악 따로 있소, 연극 따로 있소, 아니다 모여라 모여,
탈춤봐라! 굿봐라!
우리가 언제 그토록 뿔뿔이 갈갈이 헤어져 살았더냐.
자생이다!
자발이다!
왈,






퍼포먼스本始本來이땅에서탈춤性굿性싸잡아民衆的自然發生說.
논증하라 기록하라 보관하라 풀어헤쳐라.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이 큰韓사람나라는 도시 恨나라인지 전통입네 민속입네 그 한가운데에는 한많아 한스러워 한이 맺혀 한을 품어
恨을 토착화하라. 더 더욱 뿌리깊게!
恨을 수출하라. 국제저작권조약!
음과 양의 조화다 합일이다 태극이다 무극이다 주역이다 정역이다 오행이다 다행이다 노자다 장주다 나비다, 나비다 장주다 맹자다 공자다 道다 性이다 物이다 神이다 心이다 生命이다 理다 氣다 이원론이다 일원론이다.
주문이다 주술이다 불림이다 살풀이다 즉흥성이다 몰입니다 Zen이다 4'33",
禪이라 말하는 곳에는 禪이 없노라 없겠노라 있노라 있겠노라 시끄럽다!
굿이란 말은 시베리아어로 精神이라 합디다 굿이요 굿 굿 굿 굿바이 미스터 파이크!
껍데기는 가라.
한때 그리도 가슴 설레이게 하던 아방가르드는 제 말값도 못하고 뒤로 처졌는지 너무 앞서 가버렸는지, 포스트아방가르드는 어떤지?
反예술은 半예술되어 반감에 못이겨 저 멀리 사라져 버렸는지, 드디어 合되었는지?





자, 퍼포먼스 나와 주자.
이 장사 잘될 유행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급살 맞을 지 도시 헤아릴 길 없으나
해프닝은 뭣이고 또 이벤트는 뭡니까? 촌수가 어떻게 됩니까?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치밀한 계획하에?
빅이벤트가 터졌다. 엉성한 조작아래?
퍼포먼스 퍼포먼스 하는데 대체 퍼포먼스는 무엇입니까?
총체예술이다?
대저 우리의 생이 총체적 모습 아닌 구석이 어디 있으며 있었으며 있을 것이며, 양춤 추고 징꽹과리북장구 극장아 무너져라 때려쌌고 레이저라 여기저기 쏴쏴대면 총체인가? 총체예술이냐? 토탈아트냐? Gesamtkunstwerk?
음악과 미술의 만남 무용과 시의 혼연일체 연극과 종교의 융합 소설과 영화의 제휴,
그거 아니고
소리꾼과 환쟁이의 정신적 얽힘이요, 시인과 춤꾼의 혼의 결합, 무대와 종교심성의 혼융, 이야기꾼과 감독의 결탁인진저
어디 형식과 내용이 별개로 주체와 객체가 제각기 현실과 실존 구조 현상, 언제 그리 따로따로 제 집 짓고 등졌던가.
퍼포먼스인지 퍼포밍아츤지 리빙디어터인지 플락서스인스 댄스피스뮤직피스인지 죄다 내버려도 집어 치워도 도대체 아까울 것 하나 없으니
행위예술이라 행위미술이라 연희라 연행이라 행위음악이라 행동음악이라 행동미술이라 전위예술이라 실험예술이라 현대판 굿이라 굿의 현대화라 마당굿이라 몸부림판이라 지랄발광판이라 중구난방하는 길목에 퍼포먼스퍼포먼스퍼포먼스퍼포먼스 자꾸 자주 설왕설래 하는 와중에 입방아 찧는 도중에 티비처럼 라디오처럼 샴푸처럼 커피처럼 아예 입버릇 되어 버릴까 걱정스러워 밤잠을 다 설쳐대는데,





어이 게 누구냐, 김영화는 몰라도
피카소다잭슨폴록이다뒤샹이다포보로브스키를 모를까 보냐 아르또오라브레흐트라그로토우스키라쟝주네를 모를 수가 모를 재주가 있겠느냐, 존케이지도모르냐죠셉보이스도모르냐베크냐모리나냐커어비도모르냐. 모르냐?
내 애비 에미애비 내 에미 애비에미 나도 몰라라.
지금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퍼포먼스라는 단어를 개념을 굳이 굳이 꾸어와서 마르고 닳도록 부르고 불러 쓸데없이 빚진다면 차후, 그 죄갚음은 누가 치룰 것인가?
하여
나 자신 나의 작업을 供演이라 이름짓는 바,
공연이라 기왕 있는 公演과 부르는 소리 같아 좋고 나쁠 것도 없고 있고.
이 세상의 낯짝을 당당히 대면하기. 이름붙일 길 없는 어떤 힘을 타고 가기, 길러내기, 불러내기, 온갖 거칠 것을 꾸짖고 따지고 시시비비 가리기.
참생명의 참고향을 물어물어 찾아가자 너 어디 있나? 길 찾아 나서자, 소를 찾아 나서다 소 발자욱을 보다 소를 보다 소를 붙잡다 소를 길들이다 소를 타고 집에 돌아오다 소는 잊고 사람만 남다 사람과 소를 함께 잊다 근원으로 돌아 가다 저자에 들어가 손을 내리다. 콧구멍 없는 소. 거울이 비었다.
이리 오너라.
너, 거기 있나?
대답하고 용서하고 타이르고 매듭짓고 풀어헤치기, 또 다시 만나기 부딪치기 비우기 닦기, 얘들아 일어나라, 내가 깨어 너를 깨우기 네가 깨어 나를 깨우기 내가 너를 살리고 네가 나를 살리기, 내막을 밝혀라 전모를 파헤쳐라 뱀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지 말라.
함께 함께 신이 내려 올라 들려 나서 감고 풀고 춤추고 노래불러라.
광대 그리스도 사제 즉 무당.





하나의 씨앗에 온 우주가 우주의 첫 울음소리부터 길고 머나먼 미래가 다 들어있고, 삶과 죽음이 미움과 사랑이 선과 악이 기쁨과 고통이 만나고 헤어짐이 하늘과 땅이 밝고 어둠이 물과 불 흙과 돌 즐거움과 괴로움이 이단과 정통 신과 악마 죄와 구원이 지옥과 천당이 아름다움과 추함이 고상함과 경박함이 귀하고 천함이 씹과 사랑 신성과 세속 혼과 육신 앞뒤 겉속 안팎이 다르고 같음이 만날 때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것이 만남의 고통과 이별의 기쁨이 네 죄 내 죄 알고 모름이 끄떡임과 도리질이 벌건 대낮과 깊고 푸른 밤이 무덤과 자궁이 개소리와 부처님 말씀이 번뇌와 해탈이 진흙과 연꽃이 콧구멍과 고삐가 있고 없음이 죽음에 대한 괴이한 사랑과 생에 대한 끝없는 분노가 밥과 똥이 일과 놀이가 거지발싸개와 TV Bra, 美術과 迷述이 싸움과 평화가 전쟁과 장사 황금의 꽃 같이 빛나던 옛 맹세와 허공 속에 묻힐 그 약속이 양심과 시국이 침묵과 참여 오른손과 왼손 꿈과 좌절 울고 웃음이 총체와 나뉨 독차지와 나눔 모임과 흩어짐이 왼쪽 양말과 오른쪽 양말이 참과 거짓이 옳고 그름이 그들에게 假面을 던져라, 그러면 眞實을 말할 것이다 탈과 복면이 드러내고 감춤이 精通과 짐작이 정책과 술책이 전략과 계략이 해답과 물음이 迷題와 解題 삼불과 다비 해방과 구속이 분리와 통일이 묶임과 자유 획일화와 다원화 神託과 술주정뱅이의 미친 하늘노래 玄關과 渡江이 제물과 뇌물이 시왕굿과 정토굿 입구와 출구 고임과 혁명 극락정토 칼산지옥 검은 고독 흰 고독 너와 나 주와 객 모와 순 공과 색 음과 양이,
구별없이 차별없이 분별없이 다 들어 있다 들끓고 있다 뒤척이고 있다 살고 있다 죽어 가고 있다 다시 태어나고 있다, 흐른다 흘러.
말하기는 쉽다만, 제가끔 찾고 잊고 버리지 못하면
喝.





전세계적 전우주적 전인류적 세계는 하나, 해도 내밥 네밥 있는 놈 없는 놈 웃는 놈 우는 놈 죽일 놈 살릴 놈 계집 사내 경우지게 따로 있고, 누런 놈 붉은 놈 검은 놈 하얀 놈 틀림없이 달리 있고, 땅모양새가 틀리고 물맛이 다르고 춥고 덥기가 각각이니 입고 먹고 생각하고 느끼는 방법 묘법 기법 작법이 다른 법.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랑이 다르랴 고통이 없으랴 그리움을 모르랴 하늘을 모르랴.
내가 하늘이다 하늘이 나다 한울을 내몸에 모셨다 후천개벽이다, 아무리 쓰고 뱉고 우겨싼들 그거 다 행하지 않으면 빛좋은 개살구요 그림 속에 떡이요 꿈 속에 고향이요 죽은 자식 나이 세기.
이를 두고 어떤 현미경은 “병은 병균을 둥근 테 안에 넣고 보는 시인.”이라 했,
뭐얏?
헤헷.
다시,
이를 두고 어떤 병균은 병은 시인을 둥근 테 안에 놓고 보는 현미경?
다시!
이를 두고 어떤 둥근 테는. . .
에잇! 또, 다시! 다시! 다시!
예까지 왔다면 이제 알아 먹겄다.
이를 두고 어떤, 어떤 한 시인은 “병은 병균을 둥근 테 안에 놓고 보는 현미경.”이라 했거늘.





예술이 생의 의미를 찾는 일이거나 사회정의를 일깨우거나 일종의 오락 혹은 심미적 즐거움을 도모하거나, 생을 둘러 싼 온갖 환경과 조건에 動하는 物로서 그 모든 것들과 상호의존하는 人으로 間을 관계 맺는 뒤얽힌 감각과 생각이 불필요한 간극을 가진 매체의 영역을 넘나들며 제 나름의 존재양식과 세계관을 밑둥 삼아 생의 여러 양상을 보는 방법과 감수성을 드러내는 바,
제반 공연예술과 소위 행위예술의 중요하고도 어려운 차이점은 이러한 작품들의 힘은 모종의 전달이 아니요 어떤 체험이 되고자 함에 있으므로 하나의 작업이 완성되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기 위해 던져지는 장소에 있는 한,
行을 爲하는 일에는. . .
마침표가 없다!
해답은 없다! 다냐?
물음이 없다! 다다.





종교네 음악이네 민속이네 미술이네 춤이네 전통이네 탈춤판이네 굿판이네 연극이네 문학이네 정치네 철학이네 과학이네 하는 따위가 결국은 다 함께 서로서로 따로따로 끼리끼리 갈래갈래 만났다 헤어졌다 어울렸다 갈라졌다 얼크러져 설크러져 제 재주껏 힘껏 능력껏 한껏 끝없이 마침없이 다함없이 끊임없이 펼쳐 나아가는 것.
흑이다 백이다 청이다 홍이다 황이다, 북이다 서다 동이다 남이다 가운데다리다,저 제 근본 내력은 몰라도 남의 나라 말이야 생각이야 느낌이야 마치 제 집 신주단지 모시듯 애지중지, 빠리야 뉴욕이야 굶은 쥐 풀방귀 드나들 듯 빵집이냐 들락날락 옷집이냐 두리번 두리번 구두방이냐 의기양양, 잘날 놈. 몹시 훌륭할 년.
經歷은 期必코 漢文 English Français로 超過達成! 盟誓코 曖昧模湖 複雜多段하게 無國籍的 權威的 迷述할 것! 期必코 前記事項만은 假짓 없이 내 假짓에 盟誓코.





제 나라사람 제 땅 제대로 알아 보고 제대로, 제 나라노래 제 나라그림 제대로 부르고 그리면 제대로! 수상쩍을 년. 어째 골치 아플 놈.
제 에미 뱃 속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게 모두 그렇고 튀어 나와서 보고 듣고 배우는 게 온통 그렇고 모여서 보고 듣고 배울 게 다 그렇고 그러니
엘리트야 아카데미야 코스모폴리탄이야, 얼 빠지고 넋 잃고 혼이 없어 놓으니 쌀뒤주가 안방에 요강이 응접실에 쇠방울 엿장수가위가 서재에 장독은 재떨이로.
전통예술이로다 민족예술이로다.
우르르르 무차별적 긁어모음. 이뻐서 그러나, 남들 다 하니까.
와르르르 무분별적 몰켜다님. 좋아서 그러나, 남들 다 하니까.
있으신 분들 배우신 분들 하는 짓이야 어디 동서 가림없이 언제 어디 오늘 만의 일이겠는가. 그러나 전통이요 민속이요 무속이요 민중이요 그거 精通하다 보면 드러난 것만이 正統이 아님이 아님이 필시 아님일시, 아끼고 가꾸고 보살피고 사랑하되 변함없이 그대로 가두어 박제하여 흐르지 못하게 하면 그것이 오히려 전통의 질곡이요 왜곡이요 멍에요 고삐되니 그 또한 물꼬를 터주고 쓸데없는 말뚝을 뽑아 버릴 일.





해서,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마를 때 물 찾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 외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생각 간절하듯 생각 생각 잊지 말고 제 나름나름의 생각과 느낌과 재주를 깊이 궁구하여 더욱 더 크고 넓게 짓고 짜고 엮고 갖추어서 네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내것같이 알아, 내것만이 내것이 아니요 네것도 내것되어 네것 내것 따로없이 내것이 네것되어 네것이 내것되어 나는 너에게 이바지하고 너는 나에게 베풀어 우리 모두 함께 나누되, 잘났네 못났네 눈치보거나 짓밟지 말고, 사람은 사람을 하늘과 같이 섬길 供.





물은 쉬임없이 흐르는 것이 도리요 흐르면 흐를수록 맑고 깨끗해지고 돌뿌리에 부딪쳤다 하면 더욱 크게 치솟아 거침없이 거슬러 막힘없이 흐르고 흘러, 가없이 넓어지고 윤택해질 演.





供演이라.
하되, 용의 눈인가 뱀의 발인가 분명코 확연히 달리 있으니
하여튼 여하간 어쨌든 좌우지간 저질러 봐야 알아도 알 일 느껴도 느낄 일 봐도 볼 일 생각해도 생각할 일.
허나, 생각사 생각수록 혼미한 이 마음 보고 볼수록 앞길이 캄캄 느끼되 느낄수록 바람 속에 등불이라, 알면 알수록 물건너 물이요 산넘어 산이 어찌 제 혼자만의 일이랴.
어찌 됐건, 어찌 될 것이건 간에 세상만사 제 뜻대로 의심하고 의심화되 ‘육신이 생각되어 생각이 육신되어 말씀이 모양되어 모양이 말씀되어 생명이 물건되어 물건이 생명되어’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만 보지 말고!



부디 부디 우리의 생이 供하는 마음으로 演되도록
시위들 허소사.







김영화 供演판 난, 죄 없어! 1987 팸플릿 전문